좋은 글은 정확하게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작가의 문장은 지나침도, 부족함도 없이 그대로의[正] 세계를 견고하게[確] 겨냥한다. 문장의 정확함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식의 정확함에서 가능하다. 인식은 오해와 이해의 변증법적 진행의 결과물이다. 이해했다고 자만하는 순간 오해로 판명나기도 하고, 오해는 때때로 다른 차원의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렇게 이해와 오해의 줄타기를 하며 인식은 정확함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이 지난한 과정을 이끄는 동력은 사랑이다. 사랑은 오해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결국 대상을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안간힘 아닌가.
비평도 그런 것 아닌가 싶다. 좋은 비평은 대상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한다. 프랑수와 트뤼포의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은 문학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프랑스 영화를 신랄하게 가격했지만, 그가 사실 바란 건 스스로 사랑했던 영화들이 제 평가를 받는 것이었을 것이다. 역사상 그만큼 영화를 사랑했던 사람을 찾긴 쉽지 않다. 그러나 영화를 사랑한다고 모두가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대다수는 극장에서 나와 나름의 인상평을 나눈 뒤 현실로 돌아간다. 이들은 그 영화 전체 이야기 맥락을 이해했지만, 어떤 모호한 장면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겨둔다. 어쩌면 영원한 오해로 남을지도 모른다.
씨네필은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보며 수수께끼와 오해를 풀어간다. 때론 이해했다고 판단했던 장면이 오해였음을 번뜩 깨닫기도 하고, 감독이 의도한 오해를 깨닫고 영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차원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영화 안에 존재하는 나름의 질서를 파악한다. 어떤 영화는 영원히 정리되지 않는 무질서를 갖고 있는데 그 무질서의 존재 의미가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그 영화에 대한 '나' 나름대로 가장 정확한 인식이며, 그것은 그 영화를 사랑하는 나만의 방식일 수도 있다. 그것을 글로 쓰는 건 무딘 인식을 벼리는 작업이다. 영화가 가진 '그대로의' 세계를 정리하는 작업인데, 비평이라면 '견고하게' 그것을 쌓아나가야 한다. 바꿔 말하면 그 영화에 대해 정확하게 쓰는 일이며, 다시 바꿔 말하자면 영화 비평은 영화를 가장 정확하게 사랑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