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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dy Run Jan 12. 2024

영화에 대한 단상

‘영화가 무엇인가.’ 어떤 칠판에서 본 이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영화의 의미를 묻는 이들은 대체로 ‘영화란 무엇인가’라거나 ‘영화는 무엇인가’라고 쓴다. 김훈은 소설 『칼의 노래』에서 첫 문장으로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고 썼다. ‘꽃은 피었다’가 아니다. 조사 하나 차이로 김훈은 자연의 영속성과 인간 역사의 덧없음을 강조한다. 조사는 대상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영화란’ 또는 ‘영화는’이라고 물을 때 영화는 진지한 무게감을 갖고 있는 어떤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영화는 삶의 의미와 동의어일 수도 있다.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를 읽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반면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선 영화가 무거운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다. 영화는 일상의 여러 요소 중 하나일뿐이라는 사뭇 가벼운 태도도 질문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와 관련된 일이 내 밥벌이가 됐으면 했던 때가 있었다. 영화를 생사의 문제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 속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언저리에 있기를 바랐다. 그땐 영화가 진지한 무게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영화는 이제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영화가 제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인이 영화의 형이상학적 목표를 말할 때, 난 일상을 추동하는 건 형이하학이라고 냉소한다. 이젠 영화에 대한 실물감 없는 언설들이 공허하기만 하다.


그런데 일상은 공허하지 않은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긍정할 자신은 없다. 때때로 삶은 지리멸렬하고, 삶과 삶이 부딪히는 순간은 이전투구며, 삶들이 모여있는 공간은 무간지옥이다. 그래서 현실은 더 비현실적이다. 복선 없는 삶은 문법에 안 맞는 비문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가능태로서의 삶을 꿈꾸는데, 영화 속에 그게 있다. 영화 속의 삶은 실제 삶보다 문법적이다. 영화엔 우리가 살아내야만 하는 창백한 일상이 아니라,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생기 있는 인생이 있다.


그래서 영화관에 여전히 간다. 불완전한 삶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이며, 스스로 내 불완전한 삶에게 보내는 야유다. 이젠 더 이상 누구도 내게 ‘영화란 무엇인가’라고 묻지도, 내가 묻지도 않는다. 그래도 아직까진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중요하다,고 문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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