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장애는 장애가 아닙니다.
아침 기상 알람이 울렸다. 일어날까, 5분만 더 잘까 하는 선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세수를 찬물로 할 것인지, 뜨거운 물로 할 것인지, 비누를 쓸 것인지, 쓰지 않을 것인지의 선택이 이어진다. 아침밥을 먹을 것인지 안 먹을 것인지까지는 쉬울 수 있다. 그다음의 고민은 좀 어렵다. 오늘 옷은 뭐 입지? 보기가 많을수록 선택은 어려우니까.
망설임 때문에 쉽게 결정을 못할 때 흔히들 '나는 결정장애가 있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가끔이라기엔 꽤 자주, 진짜로 결정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본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혹은 내가 좋아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이 있다.
'선생님, 저 어제 치킨 먹었어요!'
'그래? 무슨 치킨?'
'음... 그건 모르겠어요. 엄마가 시켜주셨어요.'
이런 일이 반복될 때 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달팽이 카페를 운영하면서, 아이들은 늘 주문을 받는다. 카운터에서 메뉴를 이것저것 주문하시는 선생님들처럼, 카페 운영이 끝난 뒤 아이들도 각자 먹고 싶은 음료를 한 잔씩 마실 수 있다.
그런데 그 한 잔이 쉽지가 않다.
음료 한 잔 마실래?
여기서부터 막히는 아이들이 있다. 음료를 마실까, 말까, 겨우 Yes or No의 질문에도 선뜻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그래서 ‘아, 선생님! 음료 한 잔 마셔라!라고 말해주세요-‘ 와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아이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그 말을 해 주지 않는다.
뭐 마실래?
여기부터는 흔히들 말하는 결정장애의 상황일 수 있다. 그러므로 천천히 시간을 두고 고르도록 기다려준다. 우리 카페에서는 직원 본인의 메뉴는 스스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추려질 수 있다. 제조 방법의 난이도나 복잡함의 정도에 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은 어렵다(나도!ㅋㅋㅋ).
2단계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나는 질문을 단계별로 나눈다.
커피 마실 거야, 다른 음료 마실 거야?
아메리카노? 아니면 라떼 종류?
시럽 넣을 거야, 안 넣을 거야?
녹차라떼, 레몬 음료, 과일 티?
따뜻하게, 아니면 차갑게?
이 단계를 모두 거치면 자신이 먹고 싶은 음료를 제조해서 마시는데, 음료 제조시간과 마시는 시간보다 선택하는 시간이 더 긴 아이들도 있다.
이것은 사실, 식당이나 카페 카운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내용이며, 과정이다. 사람들은 결정하기 전에 고민하는 시간을 경험하고 또 경험하며 자신의 삶에서 마주하는 많은 것들을 선택해나간다.
그렇다면 발달장애인(지적장애인)은 선택을 할 수 없을까? 선택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은 아닐까?
https://youtu.be/-u7Jn2pmBm4
내가 경험한 아이들의 결정장애 원인은 대부분 지나영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경우 중에서도, 결정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결정의 기회를 가져보지 못해서 두려운 경우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어젯밤에 치킨을 먹기로 결정한 사람은 아빠,
어떤 치킨을 먹을지 결정한 사람은 엄마,
아이는 단지 앉아서 먹었을 뿐인 일상이 반복되는 동안 아이는 늘 결정된 것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 우연한 어느 날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선택의 순간에 놓였을 때 아이는 결정하는 일이 낯설어 어쩔 줄 모르는 바로 그때, ‘그것도 못하냐’는 책망까지 들려온다면, 아이는 결정이 한없이 두려워질 것이다. 그 결정을 끝내 한 번 해 보지도 못하고, 또는 그 결정이 틀렸다고, 너는 장애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말이 아닌 태도로 표현되는 그 무어라 할 수 없는 그 느낌을 아이가 받는다면, 아이는 그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 발달장애, 지적장애 학생들 가운데 이 과정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아이가 과연 있을까?(나 역시 이런 태도를 한 번도 취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단순히 편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좋고 옳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대신 선택해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일까? 그가 아메리카노를 먹고 싶다 할지라도, 그것은 맛이 쓰니 캐러멜 마끼아또를 먹으라고 하는 나의 선택이 더 옳은 것일까? 아니면 묻지도 않고 시럽을 추가해주는 것이 진정한 친절일까? 오히려 ‘아, 이것은 이런 맛이구나!’ 하고 커피의 쓴 맛을 경험해 볼 기회를 빼앗은 것이 아닐까? 커피가 쓸 때는 시럽이나 설탕을 추가해서 먹을 수 있다는 것과, 그 외에 달콤한 커피 메뉴가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도움과 친절이라는 이름으로 박탈당한 것은 아닐까?
결혼하고 싶다고 남편을 데려왔을 때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 내가 내 아이에게 해 주고 싶은 말로 내내 남아있는 그 말이 다시 떠오른다.
나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생각이고,
너에게는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
결정은 네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