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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공팔 Apr 17. 2024

이토록 절절한 서문이라니...

<간송 전형필/ 이충렬/ 김영사>


<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김영사>


서문을  신경 써서 읽는 편이다. 책을 구매할지 여부는 서문으로 시작해서, 목차, 뒷장 에필로그를 들춰 본 후에야 결정된다. 꽤  진중하게  선택을 하는 것 같지만 나의 책 컬렉션이 그리 깊이 있진 않다. (뻔한 자기 계발서, 킬링타임 용  로맨스 소설도  허다하다.)
저자의 가치관과 전체적인 책의 개요를 서문을 통해 확인한 후, 나름의 진정성이 내 맘에 와닿으면 읽고, 아님 말고 식이다. 서문이 없는 소설의 경우는? 첫 단락과 맨 마지막 장의 마지막 단락을 정독한 후 읽을지 여부를 결정한다. 이야기의 결론보다는 그곳으로 가는 과정에서 인물이 느끼는 심정변화에서 의미를 찾는 게 더 재밌다.  

이런 내게 인생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서문은 사서의 하나인 [대학 大學] 서문이다. (응?)

[대학지서/ 고지태학/ 소이교인지법야 大學之書, 古之大學, 所以敎人之法也...] 지금도 외고 있다. 엄청 길다.
학부 전공과목이었던 고전문학의 이해 수업시간 교재가 [대학]의 서문이었고. 우리는 그 서문을 모조리 외우고 뜻풀이를 했다. (어차피 이놈들 다 읽을 능력도 안되고,  책의 개요라도 이해하라는 교수님의 특별한 배려...) 놀랍게도 모조리 외운 그 중국 그림들을 낱낱이 쓰고, 뜻을 다는 게 시험의 전부였다. 토록 서문이 중요한 때가 없었다.




서문과의 특별한 만남은 10년이 흘러 <간송 전형필/ 이충렬/ 김영사>에서 다시 시작됐다. 간송 전형필이 궁금해져서 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뜻밖에도 서문이 더 인상적이었던 경험이다.

이 정도로 감정을 절절히 내보이는 서문은 처음이었다.

간송 전형필에 대한 존경이 가득 차 있었고  혹여 간송 선생께 결례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필체가 조심스럽고, 단정했고, 겸손했다.


간송 전형필 동상 앞에 선 그는 되뇐다.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왜 내 마음이 이렇게 벅차오르는지요?" 6.
"제가 선생님 이야기를 써 보겠습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큰 일을 해냈는지, 왜 문화재 수집에 억만금을 쏟아부었는지, 어떤 번민과 고통이 있었는지, 선생님이 수집한 문화재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오늘의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8.


저자는 전형필의  애국심과 그의 행적이 갖는 역사, 문화적 의의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 서문에서는 작가가 간송 전형필을 마음에 두게 된 계기, 약 3년에 걸친 자료 수집과 글쓰기 과정을 이야기한다. 참고한 자료를 활용해서 보다 생동감 있게 간송선생을 그릴 수 있는 방식을 찾기 위해 어느 정도 상상력을 동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한다. 책은 소설 형식을 취한다. 그의 삶과 문화재 수집과정을 현장감 있고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데 적합한 것 같았다.  




간송 전형필(1906~1962)

일제 강점기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지금으로 치면 재벌이다. 그 많은 돈을 문화재를 모으는 데 사용했단다.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고서 모으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휘문고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이면서 당시 미술 선생님이셨던 고희동 선생을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고희동 선생은 전형필에게 서예와 그림을 가르쳐 주었고 동시에 자국의 역사와 문화가 중요한 이유를 일깨워 주며 간송 전형필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준 멘토 같은 분이셨다. 선생의 바람대로 간송 전형필은 일제 강점기 때 타지로 팔려나가는 우리나라 보물들을 사들여 민족 문화와 정신을 지키는 수장가의 길로 가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개인 박물관인 보화각(1938년, 현 간송미술관)을 설립하신다.



#1 간송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유물은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고려시대 상감기법은 도자기 형태를 만들고 흙을 무늬대로 파내어 그 안에 흰색 안료를 채워 넣고 평평하게 긁어낸다. 그리고 유약을 발라 구워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청자실에 가면 자세하게 설명도 잘 돼있고 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푸른색 자기(청자)이고, 상감기법으로 만든(상감), 구름과 학 무늬(운학문), 매병(병모양 이름)" 이란 뜻. 도자기 이름은 대체로 도자기 종류, 색, 기법, 무늬, 병 모양 순서로 이름  붙여진다.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높이 42.1㎝, 국보 제68호, 간송미술관 소장. 몸체의 원 무늬 안에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학을,  원 무늬 밖에는 땅으로 향하는 학들을 상감기법으로 표현했다. 당당한 형태와 완벽한 문양 구사가 돋보이는 대표적인 고려청자  매병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2 최고가 매입

문화재를 보는 안목이 워낙 뛰어났고 그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셨기에 문화재 가격을 흥정할 때면 기꺼이 비싼 값에 매입했다고 한다.  


"마에다 상, 가격을 말씀해 보시지요."
신보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흥정할 태세를 갖추었다.
"신보 상, 이미 말씀드렸듯이 2만  원이오."
“이제까지 2만 원에 거래된 청자 매병은 없습니다. 그건 마에다 상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총독부에서 제시했던 만원에  5천 원을 더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 가격이면 지금까지 거래된 청자 매병 중에서 최고가입 니다." “신보 상, 이만한 명품이 또  나올 거라고 생각하시오? 이 매병은 평생에 한 번도 만나기 힘든 명품 중의 명품이오." 24.


# 3  문화재 보존을 위한 필살의 노력

6.25 전쟁 때 보화각에 있는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서 동네 근처 빈집에 숨어서 감시하던 일화나  훈민정음 해례본을 품고 피난 갔던 일화


6.25 전쟁 때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수장품들을 북으로 가져가기 위해 보화각에 들이닥쳤다고 한다. 당시 보화각 온 인민군 대장은 월북화가 이석호. 화가인 만큼 보화각에 있는 문화재들의 가치를 잘 알 고 있었다. 인민군은 수장품을 온전하게 보전해 가져갈 수 있도록 국립박물관을 지키던 최순우와 손재형(서화수집가이자 서예가)을 불러들여 수장품들을 온전히 다루고 포장하게 한다. 두 사람은 소장품들이 북으로 옮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지를 발휘한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일의 속도를 늦추고 술까지 먹여 가며 시간을 끌었다. 간송 전형필은 당시 근처 빈집에 숨어서 긴박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최순우와 내통해 시간을 끌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손재형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일부러 굴러서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런 긴박하고 두렵고 초조한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사건이 절묘한 타이밍에 터진다.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으로 연합군과 국군이 서울을 다시 탈환하게 되고 이석호와 인민군 일당은 하룻밤 새에 도망가 버리고 만 것이다. 천운이었다.


#4  위창 오세창 선생

간송선생이 문화재에 눈을 뜨고 문화재 수집 보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한 데는 고희동 선생님과 위창 오세창 선생의 역할이 매우 컸다.  선생은 간송(澗松)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으며,  문화재를  감식하는 눈을 뜨게 해 주고 간송이 문화재 수집으로 민족운동을 할 수 있도록 결정적 역할을 하신 분이다. <불교언론 법보신문, 호수 1442>.

간송은 문화재에 조회가 깊고 심미안도 갖춘 분이었지만, 문화재를 수집할 때는 오세창 선생께 조언을 구하고 의지 했다고 한다. 오세창 선생은 독립선언서 33인에 이름을 올리신 독립운동가이기도 하고 서예가, 서지학자, 언론인이시기도 했다. 이분께서 고서에 가격을 매기면  그게 곧 값이 된다 할 만큼 저명하신 분이었다.






누군가는 민중 속에서 대한독립의 만세를 외치고 무력 투쟁을 하고 또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부를 털어 민족정신을 보존하는 것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애국했던 그 마음이 감사하다. 한국사 책이라면 꼭 실려 있는 고려시대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 이 책을 접한 이후로는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다. 반가움과 동시에 애잔함이라는 낯선 기분이 들기도 해서 당황스럽기도 하다. 라질뻔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간송의 마음이 느껴져서일 거다. 어렸을 때 박물관 가면 너무 지루했는데,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었던 거다. 그저 보여서 보면 그냥 물건일 뿐이지만 알고 바라보면 유물이고 보물이 되고 그것에 깃든 세월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느낄 수 있다. 정을 이입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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