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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공팔 Apr 01. 2024

그것이 차라리 악몽이었기를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성/ 서해문집>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시국에 국가가 자행해 국민을 학살한 국가폭력의 전형을 보여준 사건. 제주 4.3 사건.

정부가 공식 사과한 민간인 학살사건.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기술한 역사서라서 어른이 학생에게 설명하는 기술방식으로 사건의 발단부터 진행 과정까지 차근히 설명한다. 중간마다 강요배 화백의 작품을 실어 사건을 실감하게 도와준다. 4.3 사건은 근현대사 서적을 통해 일부 한 챕터 정도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전체 사건을 접한 건 처음이었다. 제주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만나봐야 할 책은 아닐까 싶다. 무언가를 사랑하는데 그 흠집과 아픔을 보듬는 마음도 필요한 거니까.  




우리나라 해방직후, 미국과 소련은 점령군 형태로 우리나라에  주둔했다. 그들은 편의상(미국은 소련을 견제 중) 38도 선을 그어 통치하기로 한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할 것을  결정한다. 쟁점은 신탁통치였다(이 시점 동아일보 신탁통치 오보 사건이 있다 1945년 12월 27일 ). 해방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강대국의 식민지 생활을 해야 한다는 분노와 두려움이 민족 모두를 불안하게  했다.  신탁통치를 두고 결과적으로 좌익은 찬성으로 우익은 반대로 기울어지는 상황에서 좌우 의견과 이념 대립이 심화된다.

1차 미소공동 위원회가 결렬되고 양 극단의 대립 속에 여운형(중도 좌파)과 김규식(중도우파)을 주도로 좌우 합작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와는 반대로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해서 남북분단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세계정세는 냉전시대로 들어서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반복 결렬되면서 미국과 소련은 우리나라 문제를 유엔총회에 넘긴다.      

유엔 총회에서는 가능한 지역이라도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하자고 제안하고 소련은 당연히 거부한다. (북쪽에 인구가 적다) 이후 유엔 소총회에서는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총선거를 하자고 5.10 총선거를 제안한다. 회주의 세력인 좌도 민족주의 세력인 우도 모두 5.10 총선거를 반대했다. 이렇게 되면 조국의 분단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정세 속에서 바로 대표적인 우익세력인 김구선생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성명서발표다.

"삼천만 자매형제여!

한국이 있어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독립적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의 집단의 사리사욕에 탐하여 국가민족의 百年大計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우리는 과거를 한 번 잊어버려 보자. 甲은 乙을 乙은 甲을 의심하지 말며 唾罵하지 말고 피차에 진지한 애국심에 호소해 보자!..."
(서울신문, 1948. 2. 13;경향, 조선, 1948. 2. 11)


https://db.history.go.kr/contemp/level.do?levelId=dh_006_1948_02_10_0020


남한에 있던 좌익의 대표 단체인 남로당 역시 5. 10  총선거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들은 제주에서 큰 세력을 갖고 총선을 반대하며 폭동을 일으키고자 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의 지휘를 받는 빨치산 조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주 주민들이 정부와 미군에 의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위키피디아, 2024.  03. 15)


일의 발단은 제주 역사상 최대 인파가 모인 1947년 3.1절 기념식장이었다. 많은 인파(2만 ~3만 명)가 엉켜있던 가운데 작은 소란이 일어나자 치안 문제에 촉각이 곤두 선 경찰이 총을 쏘게 되고 그 과정에서 6명의 민간인이 죽게 됐다.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이 이어지고 3월 10일 제주 전체를 아우를 만한 관민 총파업이 단행됐다. 5.10 총선거 반대 투쟁에 더해져 민간인이 희생된 데에 주민들은 격분했다.

1947년 3월부터 시작해 주민에 대한 학살 이어졌다.  주민들의 반감이 극에 달한 상황을 엎고 350 명 가량의 남로당 세력은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하여 도내의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고, 이에 대응해서 경찰과 서북청년회,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였다(두산백과 제주4.3사건). 4.3사건 이라 불리게 된 경위이다.


결과적으로 5. 10 총선거는 시행됐고, 그때의 분단은 6.25 전쟁을 거치며 지금까지 이어진다(명확하게 38도선과 군사분계선은 다르지만, 정서적 분단이라는 점에서 '이어진다'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 같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이제 살았구나 싶었는데, 이젠 한바탕 이념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주의가 뭔지 사회주의가 뭔지 그저 살궁리만 했던 제주 주민들은 두 진영의 싸움에 새우등이 터졌다. 제주에 은신하고 있던 남로당세력은 주민들을 선동했고, 정부와 미군은 제주 주민들 대부분을 좌익으로 규정했다.

 

 " 혹시  한바탕 무서운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닐까. 지옥에서 홀로 살 아남은 사람들은 그것이 차라리 악몽이었기를 바랐다. 애월읍 봉성리  강한규의 말이다. 그땐 사람들이 다 이레도 붙고 저레도 붙고 했어요. 그 모양으로 약하게 흐름 따라다니던 사람들입니다. 바람  부는 양, 이쪽으로 세게 불면 이쪽으로 붙고, 저리로 세게 불면 저쪽은 로 붙고 했습니다. 산에서 말을 하면 그것도 옳아 보이고,  또 아래서 오는 말 그것도 옳아 보이고... 어느 쪽에 붙어야 좋을지 몰랐어요. " 118

 

당시 남로당 무장대는 토벌대를 피해 산속으로 은신해 있는 중이었다. 군경과 서북청년단(토벌대)은 주민들이 무장대에게 피난처와 물자를 공급하고 있다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무참히 살상했다. 좌익 가족이어서, 좌익과 이름이 같아서... 이런저런 형태로 그저, 죽인  참극이다. 남녀노소 분별없는 학살이었다. 그렇다면 무장대라고 이 참극을 자행한 죄에서 제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장대는  무장대 대로 중산간 마을 주민들에게 협조할 것을 강요하며 비협조적인 주민을 죽이고, 군경에 협조하거나 우익과 관련된 사람들을 보복  살해했다.


2019년 12월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가 결정한 제주 4.3 사건 민간인 희생자 수는

14,442명이다. 희생자의 80퍼센트 이상이 토벌대(정부와 미군)의 손에 희생되었고, 무장대에게 희생된 사람은 전체 사망자의 약 10분의 1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제주 4.3 위원회 백서



강요배 화백은 <동백 꽃 지다>라는 화보집을 통해 그 시절의 그 고통을 고스란히  작품으로 표현했다. 닿을 수 있는 한 가장 가까이 그때의 두려움과 서글픔을 느낄 수 있다.



<부모들. 강요배 1992년> 젊은 이를 둔 부모들은 도피 입산한 자식을 대신하여 추궁당한 끝에 죽임을 당했다. <동백꽃 지다>.



<천명, 강요배. 1991년>  불타고 있는 중산간 마을<동백 꽃 지다>


<젖먹이, 강요배 2007년>
"우리 마을 북촌리에서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능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을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가족, 군인 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 가족 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은 우선 민보단 가족을 불러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네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김석보 1998년 63세 조천읍 북촌리). <동백꽃 피다, 118>

가장 마음 아팠던 작품이었다. 엄마를 잃은 줄도 모르니 그저 자기 좋아하는 엄마 젖만 빨아댄다.


제주 4.3 사건은 아직 명확한 정의를 담은 이름을 갖지 못한 상태다.  

5 · 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우, 과거에는 신군부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광주사태’, ‘폭동’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역사적 해석과 평가를 마치고 현대는 "5 · 18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정의하게 된 것처럼 제주 4.3 사건은 사회적 논의와 평가가 더 필요한 사안이라고 한다.  


4.3 사건에서 이승만정부 개입 여부를 두고 의견의 차가 있다. 학자가 아닌 입장에서야 여타부타 말하긴 어렵지만, 시간 상 제주 4.3 사건이 1947년 3월~ 1954년 9월까지 이어진 것에 비춰보면, 특히 토벌대가  본격적으로 초토화 작전을 펴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곳곳에서 주민학살을 자행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3달 만인  1948년 11월 중 하순쯤부터였다. 대부분 희생자가 이때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에 걸친 초토화 작전 시기에 생겨났다(동백 꽃 지다, 155.). 이승만 대통령 재위 시작은 1948년 7월 24일. 재위기간으로 따져보면  참담한 학살사건으로부터 자유로 순 없을 것 같다.

오로지 자유 민주주의에 반하는 무리를 초토화 해야한다는 일념에  애민정신은 안중에도 없어 보이는 사료로 남겨진 그의 객관적 행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설마 어떻게 이게 사실일까.


"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아무런 법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어린아이부터 70, 80대 노인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주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주민 집단 학살을 불러온 초토화 작전은 1차적으로는 9 연대 (연대장 송요찬)와 1948년 12월 29일, 9 연대와 교체되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2 연대(연대장 함병선)에 있다. 그렇지만 최고책임은 1948년 12월 서청 총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제주 도에 내려온 한 서청(서북청년단) 단원이 "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한 바가 시사하듯, 이승만 대통령한테 있다. 이 대통령은 1948년 늦가을에 서청 단원을 대거 제주도에 투입해 섬을 초긴장 상태에 몰아넣었고, 1949년 4월 9일 제주도를 방문해 산주 폭도들을 완전히 소탕하라고 지시했다. < 동백 꽃 지다 156>

 

죄없이 목숨과 가족을 잃은 수 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을 보노라면 공산당 세력을 처단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핑계가 무색하다.

사람보다 이념이 중요해져 버려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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