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성/ 서해문집>
" 혹시 한바탕 무서운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닐까. 지옥에서 홀로 살 아남은 사람들은 그것이 차라리 악몽이었기를 바랐다. 애월읍 봉성리 강한규의 말이다. 그땐 사람들이 다 이레도 붙고 저레도 붙고 했어요. 그 모양으로 약하게 흐름 따라다니던 사람들입니다. 바람 부는 양, 이쪽으로 세게 불면 이쪽으로 붙고, 저리로 세게 불면 저쪽은 로 붙고 했습니다. 산에서 말을 하면 그것도 옳아 보이고, 또 아래서 오는 말 그것도 옳아 보이고... 어느 쪽에 붙어야 좋을지 몰랐어요. " 118
"우리 마을 북촌리에서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능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을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가족, 군인 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 가족 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은 우선 민보단 가족을 불러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네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김석보 1998년 63세 조천읍 북촌리). <동백꽃 피다, 118>
"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아무런 법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어린아이부터 70, 80대 노인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주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주민 집단 학살을 불러온 초토화 작전은 1차적으로는 9 연대 (연대장 송요찬)와 1948년 12월 29일, 9 연대와 교체되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2 연대(연대장 함병선)에 있다. 그렇지만 최고책임은 1948년 12월 서청 총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제주 도에 내려온 한 서청(서북청년단) 단원이 "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한 바가 시사하듯, 이승만 대통령한테 있다. 이 대통령은 1948년 늦가을에 서청 단원을 대거 제주도에 투입해 섬을 초긴장 상태에 몰아넣었고, 1949년 4월 9일 제주도를 방문해 산주 폭도들을 완전히 소탕하라고 지시했다. < 동백 꽃 지다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