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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아나 Jan 05. 2024

언젠가 꿈을 꾸는 고양이

반려묘 <아리>의 3인칭 인생 에세이

01

어느 여름날 울산의 한 바닷가에서 그 고양이는 태어났다. 평범한 코리안 숏헤어 종의 핑크 발바닥을 가진 치즈태비. 울산의 바닷가는 습하고 또 시끄러웠다. 어미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고양이는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배가 고파 보이는게 없었던 고양이의 발걸음은 시끄러운 차도를 건너 어느 해수욕장까지 닿았다. 제대로 씻지 못지도 못해 검은 코딱지와 딱딱한 눈꼽이 낀 고양이는 그 곳에서 잠이 들었다.


고양이가 눈을 뜬 그 곳은 어느 박스 안이었다. 습하지 않았고, 백색 소음같은 TV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시끄러운 여자 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고양이는 이 여자 아이에게 냥줍을 당한 것 같았다. 여자 아이의 쓰다듬을 받으며 아기 고양이는 다시 잠에 들었다. 여자 아이의 손은 조금 축축했지만 아주 조심스러웠고 또 따뜻했다. 아기 고양이는 바닷물에 발을 담구며 어디론가 행진하는 꿈을 꾸었다.



02

잠에서 깨니 또다른 박스 안이었다. 이번에는 어느 뚱뚱한 여자가 박스를 건네받고 있었다. "아유, 우리 남편이 고양이는 절대로 안된다고 하네. 딸이 우는걸 겨우 달래고 나왔어요"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뚱뚱한 여자에게 박스를 건네줬다. 여자는 고양이를 보며 코를 훌쩍이더니 활짝 웃었다. '오늘따라 인간들을 너무 많이 보는걸'. 피곤한 고양이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저 이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잦아들길 바라면서.


일정 간격으로 들리는 시끄러운 소음에 눈을 떴다. 뚱뚱한 여자가 보였다. 창문을 열고 숨을 쉬고 있었다. 고양이는 당장 뛰어나가 햇빛을 쬐고 싶었지만 박스를 넘기에는 너무 작고 연약했다. 그저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코를 훌쩍이고 재채기를 연발하던 그녀는 고양이를 보자 베시시 웃으며 분유를 타줬다. 아기 고양이가 느끼기에 여태까지 먹은 밥 중에 제일 맛있었지만 재채기는 너무 시끄러웠다. 고양이는 커다란 분유가 재채기 소리마다 조금씩 줄어드는 이상한 꿈을 꿨다.



03

며칠 뒤 고양이는 또 다른 여자 대학생의 손에 들어갔다. 새 여자는 다행히 재채기는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다행인 점은 이제 박스가 아닌 원룸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원할 때 햇빛을 쬘 수 있었고 밥도 실컷 먹었다. 자라서 힘이 생긴 뒤로는 가구 위로도 점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료했다. 집은 점점 좁게 느껴졌으며, 여자는 밤 늦게가 되어서야 돌아왔고, 종종 무언가를 두드리면서 밤을 샜다. 가진 게 좁은 집과 여자밖에 없었던 고양이는 그녀에게 점점 의지했다. 늦게 들어오면 한동안 계속 야옹대며 울었고, 두드리는 무언가에 앉으며 여자를 방해했다. 그녀가 집에 와서 잠들기 전까지의 시간을 기다리며 고양이는 한참동안 잠만 잤다. 꿈 속에서 고양이는 노트북 자판으로 된 길을 뛰어다녔다. 아무리 뛰어도, 그 어느 곳에서도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04

새 여자는 고양이를 안고 어딘가로 향했다. 고양이는 또 다시 인간이 바뀌는 것을 직감했다. 여자의 얼굴도 보이지 않은채, 덜컹거리는 이동장에 갇힌 고양이는 내내 야옹 거렸고, 여자는 안절부절하며 고양이를 달랬다. 고양이는 또 다시 인간이 바뀌는 것에 불안했을까? 그저 답답해서 울었을까? 몇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고양이는 어느 낯선 공간에 풀려났다. "엄마 나 고양이 키우는데, 추석 연휴 끝나면 같이 돌아갈려고". "기어코 키우니?". "응. 일단 나 지금은 친구들 만나고 올게! 도망 안치게 잘 봐!".


새로운 공간에서 고양이는 탐색을 시작했다. 이번이 벌서 몇번째 아지트더라? 고양이는 갸웃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우선 커다란 베란다는 햇빛을 쬐기 좋아 보인다. 또 물건이 많아 점프하는데도 좋아 보였다. 환기가 잘되어 바람도 살랑살랑 불었다. 무엇보다 혼자만 숨을 수 있는 구석이 많은게 마음에 들었다. 호기심 많은 고양이는 여기 저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곳에 있는 중년여자는 하루 종일 집 안에 있었기 때문에, 고양이의 무료함을 풀어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고양이는 싱크대까지 한번에 점프해 중년 여자가 설거지하는 모습을 살폈다. 세탁기에 올라가서는 빨래를 너는 중년 여자를 바라봤다. 빨랫감을 다 개면 빨래 바구니에 들어가 재롱을 피웠다. 중년 여자가 TV를 볼때면 근처 바닥 중 제일 따뜻한 곳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낮잠을 잘때면 그녀의 발밑 언저리에서 또아리를 틀고 잠이 들었다. 고양이는 우주 속에서 위풍당당하게 태양으로 향하는 꿈을 꾼다.


손이 큰 중년 여성이 주는 밥과 따뜻한 햇빛을 간식삼아 고양이는 윤기나는 포동포동한 고양이가 되어갔다."아리, 우리 집에 있으니 더 윤기나지 않니? 당분간 집에 두고 나중에 데려가" 중년 여성이 어린 여자에게 말했다. 고양이 이름은 아리였나보다. 눈에 띄게 달라진 고양이 모습을 보며 어린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의 검은 코딱지와 떨어지지 않던 눈꼽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린 고양이는 어린 여자를 봐도 더 이상 야옹하고 울지 않았다.



05

그 후 고양이는 중년의 여자와 살게 되었다. 그것도 9년이나. 나이가 들고 뚱뚱해진 고양이는 더 이상 설거지나 빨래 널기가 새로워 보이지 않는 노련한 고양이가 되었다. 장난감에도 반응하지 않고, 누군가 자신을 만질것 같으면 쇼파 밑으로 숨어버리는 영악함을 발휘했다. 그럼에도 중년 여자가 TV를 볼때면 어김없이 그 언저리에 앉아 자리를 지켰고 잠을 잘땐 같은 침대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고양이는 더 이상 특별한 꿈을 꾸지 않는 고양이가 되었다. 하품을 하며 입맛을 다지며 눈을 꿈뻑거릴 뿐이다.


"아리가 몇살이지?". "내가 21살때 데려왔으니 10년은 되었지". "아이고 아리도 얼마 안살겠네." 중년 여자와 어린 여자의 이야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고양이는 그저 고개를 돌려 바깥 구경을 한다. 요새는 자꾸 졸리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찬다. 빠르게 밥을 먹으면 토하는 횟수도 늘어나는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고양이는 종종 중년 여자와 중년 남자에게 야단을 맞는 거 같다. 무료한 평화를 즐기던 고양이는 문득 머지 않아 새롭고 신나는 꿈을 꿀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언젠가 그 고양이가 꾸게 될 꿈을 생각한다. 어느 하루는 '그 꿈 참 기묘하다'는 생각을 하며 아침 밥을 먹는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낼 것이고, 그 언젠가는 환상적인 꿈을 마지막으로 깨어나지 않는 하루가 될 것이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그 언젠가 그 고양이가 꾸게 될 꿈은 어떤 모습일까?그리고 그 꿈을 꾸게 될 날은 언제일까?


06

여자 대학생이었던 내가 기억하는 아리의 인생은 여기까지다. 나는 종종 아리가 무지개 다리를 떠나는 상상을 하며 애틋하고 아린 마음이 가진다. 그저 뚱뚱하고 게으른 나의 암코양이가 자신의 묘생을 긍정적으로 기억하기를, 또 언젠가 꾸게 될 마지막 꿈은 부디 자유롭고 포근한 꿈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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