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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아나 Oct 16. 2024

희미한 기쁨을 걸어가

두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고 여러 번이고 눈을 비볐는지 모른다. 아주 희미하여 보인다고 말하기 민망한 선분을 찡그리며 쳐다봤다. 어릴 적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요정이 내 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흐릿한 요정이 말했다. "내가 보인다면, 넌 이제 희미한 기쁨을 걸어갈 준비가 된 거란다"


두 줄을 봤다. 코로나 진단 키트는 아니었고 얼리 테스트기였다. 며칠 전에도 숱한 한 줄을 봐왔던 터라, 남편인 동글이에게 장난치듯 "나 하고 온다!"라는 말을 남기고 화장실을 다녀온 참이었다. 천천히 물드는 테스트기를 바라보며 "흠 없네"라고 말은 했지만 혹시 모른다는 마음으로 5분 알람을 맞췄다. 띠 띠 띠- 알람이 울리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테스트기를 보기 위해 일어났다. 아가를 맞이하는 모든 부부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언젠가 찾아올 테니 실망하지 말아야지'하는 힘찬 결심과 '이번엔 우리에게 왔을까?'하는 기대 사이를 저울질하며, 우리는 테스트기로 사용하고 기다리고 또 지긋이 바라본다.


한 줄, 아니 희미한 두 줄인 것 같았다. 사실 세로선이 보인다기보다는 완전 하얗다고 볼 수 없는 얼룩이 길게 나 있었던 것 같다. 눈알이 굴렀다. 설마 진짜 된 건가? 정말로? 아닌가? 시약선인가? 하는 마음. 나도 모르게 남편을 불렀다. 임밍아웃 이벤트고 뭐고 이 희미한 무늬를 만든 분홍색 막대기의 정체를 파악해야 했다. 나는 다른 제품으로 한 번 더 테스트를 하러 갔고, 동글이는 부엌 직부등 아래에서 테스트기를 이리저리 비추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희미했고, 처음 사용한 테스트기는 좀 더 진한 분홍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래서 보이지도 않는 테스트기를 촬영해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려 봐달라고 하는가 싶었다.


다음 날을 기약하고 동글이와 나는 밤산책을 나섰다. 무리하면 안 된다는 남편의 설레발로 동네만 살짝 돌기로 했다. 숨이 트이는 깨끗한 밤 공기였다. 살짝 습한 바람을 맞으며 나와 동글이는 손을 잡으며 오르막길을 올랐고, 습하지만 또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달리할 얘기가 없던 우리는 '진짜인가?'라는 말만 괜스레 되풀이했다.


" 진짜인가? 아무것도 없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그치? "

" 내가 일부러 시약선 오류 없기로 유명한 테스트기를 산 거거든, 내일도 나오면 진짜일 수도 있어 "

" 내일 다시 해보자 "

" 여보!! 우리 애기가 생겼나 봐요, 여보!! "


호들갑을 떨며 횡단보도까지 걷던 우리 사이로 자전거를 탄 남학생이 지나갔다. 중학생 정도 되어 보였는데, 횡단보도에 다다른 그는 자전거에서 내려 길을 건너곤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슝하고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우리는 '저런 아이로 키워야 해!'라고 말했다가 동시에 깔깔거렸다. 벌써부터 우리 이러냐며, 민망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아마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내 아이의 모습으로 보이는 첫 순간이었던 것 같다. 아직 어떻게 낳을지 키울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어떤 희미한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오는 것 같아 설레고 떨렸다. 마음속이 간질간질했다.


그렇게 희미한 기쁨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하루하루 지나며 흐릿한 얼룩은 진한 두 줄이 되어갔고, 0.2cm의 아기집을 보러 가기도 했다. (의사 선생님은 0.5cm가 되지 않아 아기집이라 말할 순 없지만, '아기 집이겠죠!'하고 호탕하게 말씀 주셨다) 그리고 12주가 넘은 지금에야, 나의 동경을 위한 첫 글을 쓴다. 동경하는 아가를 위한 하루치의 기록을 조심조심 써내려가 보려 한다. 더운 여름 공기를 지나 맑고 선한 가을 바람이 불고 있다.


p.s. 12주까지의 안정기, 그리고 입덧으로 활동이 뜸했다 오랜만에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소중하게 찾아온 아기 천사를 잘 키워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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