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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Dec 30. 2015

국가 대항전으로서의 스포츠 – 엘리트 스포츠

우리나라에서 스포츠란 (2)

(출처: http://issuemaker.kr/news/news_print.html?section=100&category=154&no=1113)


 2002년 6월, 우리나라는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한일 월드컵에 출전한 우리나라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붉은 악마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다 같이 한 목소리로 국가대표 선수들을 응원했다. 2010년 2월 밴쿠버 올림픽, 김연아 선수의 연기가 시작되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숨죽이고 TV 앞으로 모였다. 점프를 뛸 때마다 모두 긴장했다가 착지하면 박수를 치고 연기를 마치고 나면 모두가 환호했다. 우리나라 선수가 어디에서 어떤 경기를 하든 항상 찾아볼 수 있는 건 태극기를 든 우리나라 응원단이다. 이렇듯 스포츠 경기는 나의 편, 내가 속한 집단을 응원하게 하는 사회 통합적 기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우리나라 선수들을 응원하는 까닭은 스포츠는 국가대항전으로써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대결을 하여 승리하길 바라는 내셔널리즘적 기능과 승리지상주의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이란 일반적으로 한 국가, 민족, 국민을 의미하는 nation이 다른 nation에 대해 스스로의 일체성이나 자립성 혹은 우월성을 주장, 과시하는 감정, 사상, 이데올로기 운동 등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스포츠와 내셔널리즘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표출하는 스포츠 의식이나 행사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한층 고양시킨다. 


(출처: http://m.isplus.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cloc=isplus%7Cm_home%7Cfotonews&total_id=18


예를 들어 국기를 국가대표 선수의 유니폼에 부착하고, 국기를 앞세운 채 경기장에 입장하며, 경기에서 승리할 경우 국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국가 대항전의 식전·후 행사에서 국가가 연주되고 국기가 게양되는 것이다.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는 ‘국민’이라는 범주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장치로 전락하여 이러한 의례는 운동선수들의 탁월성과 노력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스포츠를 국가 간의 살벌한 경쟁으로 만들어버리면서 개인을 국가에 소속된 존재,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존재로 부각시킨다[1]. 여기에 필수적으로 대두되는 것이 국위선양의 문제이며 이에 따른 승리지상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승리지상주의는 지나친 국가주의, 민족주의에서 파생되며 “승리만이 유일한 것이다”는 논리로 인간 상실의 현상을 비롯하여 스포츠의 본질적 왜곡과 기능적인 변질을 불가피하게 한다[2].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 다이빙에서 만 14세의 나이로 금메달을 획득한 중국의 푸밍샤는 3~4세부터 부모와 떨어져서 다이빙을 위한 강도 높은 특수훈련을 받았다. 푸밍샤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뒤 인터뷰에서 아버지 직업을 묻는 질문에 대답을 못할 정도로 가족과 격리된 채 훈련에만 매달려왔고 어린 나이에 초인적인 훈련으로 뇌진탕 증세는 물론 노이로제 증세까지 보이는 등 심신장애로 인해 다음 올림픽 직후 은퇴를 했다. 푸밍샤의 예를 통해서 내셔널리즘과 결탁된 승리지상주의로 인한 인간 상실의 현상을 볼 수 있다[3]. 올림픽 표어인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강하게”는 스포츠의 고도화를 촉진시키는 스포츠 윤리의 한 차원이다. 그러므로 스포츠는 특정의 규범에 제약되면서 곤란에 도전하고, 보다 곤란한 대상의 극복이고 보다 높은 기록의 달성이라 할 수 있다. 스포츠의 고도화는 이 ‘영광의 가치’ 획득을 찾아서 경기 기록이나 기술의 수준을 상승시켜 그것과 관련하는 스포츠의 모든 체제가 합리화되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스포츠의 고도화는 특히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경기에서 더욱더 현저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오직 기술 개발과 성취 수준의향상에 의한 승리만이 최고의 가치로서 인식되고 승리 이외의 가치는 도외시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이러한 승리 추구는 민족주의와 상업주의에 의해서 증폭되고 이는 스포츠 기술 수준의 보다 더한 고도화와 극도의 기술 중심주의를 재생산해 나가며 마땅히 선수들의자기표현이어야 할 스포츠 경기가 선수의 인간적 권리를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이것은결과적으로 인간소외와 자기 상실의 현상을 촉진시키게 한다[4]. 우리나라의 엘리트 스포츠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엘리트 스포츠란 국내외 스포츠 경기에서 학교, 직장, 지역, 국가를 대표로 경쟁함으로써 그 선수가 소속한 집단 및 국가의 명예와 긍지를 더 높이는데 중점을 두고 있는 선수 중심주의 스포츠이다. 지난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단은 동계올림픽 3회 연속 종합순위 톱 10 진입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올림픽 기간 중 메달 획득이 주춤하자 ‘3 연속 톱 10 목표 달성 가물가물’ 등의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올림픽에서 중요한 건 ‘메달’, 그중에서도 ‘금메달’ 획득임을 공공연히 드러낸 셈이다. 최동호 스포츠평론가는 이에 대해 “우리나라 스포츠 발전은 오랫동안 국가주의 프레임 안에서 이뤄졌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그런 시각이 여과 없이 노출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선수들이 메달 획득 도구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운동하는 즐거움이나 개인적 성취보다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시작은 유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1년 제52회 전국 체육대회 개회식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스포츠 정신 생활화를 통해 자신의 안일보다 국가 발전을 앞세우며 나라를 위해서는 언제든 사리를 희생할 줄 아는 진정한 민주시민 생활윤리를 더욱 성실히 실천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라고 연설했다. 스포츠 정신을 국가 발전 도구로 여긴 박정희 정부는 엘리트 스포츠 육성에 힘을 쏟았다. 체육특기자 제도를 만들어 일정 수준 운동 실력을 가진 학생이 학업성적에 관계없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했고, 이들 가운데서단계적으로 꿈나무 선수, 후보선수, 대표선수를 선발해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을 구축했다. 1966년 국가대표 집단 훈련시설인 태릉선수촌을 세우고, 우수 선수 양성을 위한 서울체육중학교, 한국 체육대학도 개교시켰다. 또한,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선수를 대상으로 병역면제와 연금제도 혜택을 마련하였고 이 제도는 현재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박정희 정부 이후 우리나라에서 엘리트 스포츠 선수가 되는 것은 곧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는 일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스포츠의 국제적 위상은 급상승했다. 하지만 선수 인권은 오히려 퇴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지도자는 “외국 학생들은 학교 클럽팀에서 즐기는 운동을 하지만 우리는 성적지상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학생 선수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으니 대표팀에 선발되거나 체육특기자로 대학에 가지 못하면 낙오자가 된다. 특기자가 되려면 전국대회 4강 이상의 성적을 내야 한다. 이런 성적을 못 내면 학부모가 오히려 교사를 원망한다. 욕을 하든 때리든 애들을 살아남게 해주는 사람이 ‘좋은 선생님’ 소리를 듣는 것”이라는 말도 하였다. 서울대 스포츠과학연구소가 2010년 대한체육회 등록 선수들의 학부모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이런 의식이 드러난다. 45.5%의 학부모는 ‘자녀 구타를 인지했으나 필요한 일이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응답했다. 이렇게 응답한 비율은 2012년 조사에서 46.7%로 더욱 늘었다. 2009년 김신애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도 현안보고서를 통해 ‘엘리트 선수 육성 방식 하에서 육성된 국가대표 선수들은 어린 시절부터 대부분 시간을 훈련에 할애함으로써 정규 교육 기회를 박탈당하고 그 결과 은퇴 후 진로 전환 및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정윤수 스포츠평론가는 “한국 스포츠가 세계 톱 10이라는 건 그저 메달 수를 기초로 하는 말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일반 학생은 체육을 하지 않고, 선수들은 수업을 듣지 않는데 어떻게 스포츠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나”라며 “선수 인권과 삶의 질 면에서 한국은 후진국”이라고 비판하였고 한 체육인은 “현재 우리나라 체육 시스템은 소수 엘리트 선수가 신분 수직 상승 및 풍부한 경제적 보상이라는 과실을 모두 차지하고, 수많은 평범한 체육인은 통곡하게 만드는 구조”라며 “스포츠가 운동의 즐거움과 인간 한계 극복이라는 순수한 목표에서 벗어나 금전과 명예 획득 수단으로 왜곡되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출처 : http://www.todayus.com/?p=81166)


전문가들이 이런 문제의 핵심으로 꼽는 것이 바로 ‘태릉선수촌’으로 대표되는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이다. 2014 소치 올림픽 쇼트트랙에서 3개의 금메달과 1대의 동메달을 따며 대활약을 한 러시아의 빅토르 안 선수는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모두 알고 있듯이 2006 토리노 올림픽에서 한국을 대표로 대활약 한 안현수 선수이다. 안 선수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나라의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 하에서 훈련을 받았고 국가대표로 성장하였다. 우리나라 쇼트트랙 국가대표로 활동을 하는 동안 담합과 승부조작, 선배 선수로부터의 폭력 등을 당하였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제적 선수였던 그가 부상을 당하자 대한 빙상연맹은 그를 관리해주고 보호해주기는커녕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출전하지 못하게 일정을 조정하고 선수로서 그를 버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선수생활을 계속하고 싶었던 안 선수는 이에 따라 러시아로 귀화를 하게 되었다. 안현수 선수의 러시아 귀화를 계기로 쏟아져 나온 우리 스포츠계 파벌 문제도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에서 비롯됐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엘리트 스포츠 집단에서 지도자는 승리를 위해 구성원 간 단합을 강조하고, 이들 사이에 싹트는 연대감은 외부와 단절된 폐쇄성을 형성해 결국 담합과 승부조작 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외의 경우에는 어떨까? 정윤수 스포츠평론가는 “서구 선진국에도 우리나라 태릉선수촌과 같은 시설이 있긴 하다. 큰 대회를 앞두고 집중훈련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처럼 성장기 선수를 가족, 학교, 또래집단에서 완전히 분리한 채 운동만 하게 하는 선수촌 시스템은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흔히 ‘스포츠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생활체육 분야 지원을 통한 스포츠 저변 확대에 더 큰 관심을 쏟는다. 생활체육이란 개인 또는 단체가  일상생활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참여하는 자발적인 신체 활동을 의미한다[5]. 마라톤이 엘리트 스포츠에서는 새로운 기록 작성이 목표가 되는 것이라면 생활체육에서는 심폐지구력과 체중감량 등의 개인적 신체능력의 향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일본은 1964년 도쿄 올림픽 메달 순위에서 미국, 소련에 이어 3위에 오른 뒤 중고교 클럽팀 활성화 등 생활체육 육성 정책을 펼쳤다. 2001년 도쿄에 일본국립스포츠과학센터(JISS)를 짓는 등 엘리트 스포츠 지원도 늘리고 있지만 중학생의 70%, 고교생의 50%가운동부 소속일 정도로 생활체육 기반이 탄탄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미국의 경우 우리나라 체육특기자 같은 특별전형이 있지만, 미국대학스포츠협회(NCAA)가 관리 운영하는 기준에 따라 최저 16개 핵심과목 이수, 핵심과목 평점 평균 기준 충족 등의 조건을 만족하고, 아마추어 자격인증을 받아야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2013년 공부하는 운동선수를 만들자는 목적으로 학교체육진흥법을 입법했다. 하지만 ‘학생 선수가 일정 수준 학력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학교장이 대회 출전을 제한할 수  있다’처럼 권고적인 수준이라 정작 학교현장에서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학교장은 학생선수의 학습권 보장 및 신체적·정서적 발달을 위해 학기 중의 상시 합숙훈련이 근절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규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출처 : http://www.waldorfsaratoga.org/programs/sports/)


전문가들은 엘리트 스포츠 육성에 의한 우리나라 스포츠계의 고질적 문제를 풀 해법으로 자율성 존중을 꼽는다. 특히 학생 시절부터 ‘국가 발전’이나 ‘명예 및 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운동하는 즐거움’을 위해 운동하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공부 성적은 제외하고 오직 시합 성적만 보는 체육특기자 제도와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 담합과 승부조작, 딱딱한 훈련 분위기를 유발하는 지속적인 합숙훈련 시스템의 전면 개편이 필요할 것이다. 덧붙여서 생활체육의 저변 확대로 두터운 선수층을 형성하여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보이는 선수만 집중 육성되는 엘리트 스포츠를 벗어나고 스포츠를 금전과 명예 획득 수단 아닌 순수 아마추어리즘으로 여기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6].

      

[1] 권혁범 ‘세계는 놀라지 않았다’, 한겨레 제755호, 2009.04.09.

[2] 현대사회와 스포츠 교재 편찬 위원회, 현대사회와 스포츠, 경북대학교 출판부, 1998, 27p,

[3] 전창, ‘[올림픽 세계 스타]다시 돌아온 다이빙 여왕 푸밍샤‘, 동아일보. 00.08.27

[4] 현대사회와 스포츠 교재 편찬 위원회, 현대사회와 스포츠, 경북대학교 출판부, 1998, 29~30p,

[5] [네이버 지식백과] 생활체육[Sport for all, 生活體育] (두산백과)

[6] 송화선, ‘엘리트 체육이 너무해’, 주간동아, 2014.03.03


                                                                                                                                       by 말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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