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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사람 Apr 21. 2020

서른 셋, 서른 둘

이 순간들을 붙잡아 유리병에 채워 빌고 또 빌어본다.

드문드문 조각일기들을 쓰고 있다. 



악몽과 가위눌림에 잠을 설치고 해가 뜨는 창밖을 바라보며 환기하기.


또 다른 새 오늘. 비슷비슷한 매일이 이어지는 것 같겠지만, 돌아보면 '다른 오늘들'이 꿰어져 또 다른 오늘로 이어지기도한다. 어느틈엔가 멀리 낙오된 것 같던 울적한 오늘 역시 지나고 나면 늘 새 오늘이라는 시작점으로 돌아와있다. 주절대고나면 멋대로 산뜻해지고, 답은 늘 자신에게 있긴하네.




촌스러운 사람을 좋아하고 동경해


항상 같은 긍정적인 감정만이 무언가의 동력이 되진 않는다. 부정적인 감정일지라도 꺼져가는 엔진의 동력이 될 수 있다면, 그 감정도 내 감정이니까 집중하고 이용해서 나아가다보면 승리감에 취할테지. 세상이 시어빠진 레몬만 준다면 그 레몬으로 레몬주스를 만들랬나?


얼굴에 다 드러나고 창피해도, 감정에 솔직하면서도 무례하지않으며, 내 사람에게 성실하지만 흔들리지않는 사람이 되고싶다. 동경하는 어른의 형태는 그런 것이었다. 인간의 숲 사이 뿌리내린 키가 크고 팔이 긴 나무인간. 머릿속에 기분좋은 산들바람을 연거푸 넣는 촌스러운 사람.




토요일에 빨간버스타고 자매님이 온다.


올때마다 "언니랑 마실다니고 뒹굴거리면서 고양이들이랑 힐링하러 갈께"라고 하는데 그 말도 방문도 내 인생에서 제일 예쁜 순간들같다. 이번엔 선술집, 빈티지샵, 묵혀둔 빔프로젝터로 같이 극장에서 봤던 것중에 좋았던 영화를 틀어놓고 야식을 먹기로 했다. 코로나로 전세계가 앓는 지금, 동생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많이 지쳐있었다. 나는 건강문제로 어릴적부터 어쩔 수 없이 외출을 삼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괜찮았다. 


동생이 오기로하면 집 도보거리 주택가 사이 숨어있는 사람 안 붐비고 아지트같은 가게들을 리스트업 한 후 미리 기대에 부푼다. 이사올때 눈여겨보는것중 하나가 '두세시간씩 골목탐험하기 재밌는가.' 서울에서 자라 근처 도시들 곳곳 살아보는거라 약간의 덜 북적임과 탐험의 기쁨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장문의 탄원서를 썼던 적이 있다.


피의자의 처벌이 1심 무기징역이 나왔고, 나는 피의자의 감형을 바라며 절실한 마음으로 썼었다. 그리고 그 탄원서는 피해자의 형제들에 의해 기각되어 무기징역이 되었다. 피해자와 피의자 모두 내 부모였는데, 그렇게 긴 세월 고통받고 끔찍하게 사라졌다


강력범죄 혹은 끝나지않는 가정폭력과  여성을 짓밟는 성범죄의 사연들이 내가 겪은듯 꿈에서 본듯 영상이 만들어지곤 한다. 어떻게 된게 다 경악스럽고 끔찍한데 알 것 같은 그런 범죄들일까. 대체로 의식해서라도 멍하게 있도록 노력하는데, 안 그러면 온갖 기억들이 생생하게 재생된다.


기호식품은 젤리만 과하게 섭취했는데 그마저도 요즘 질겅질겅 안 하니까, 다시 영상들이 떠올라 괴로울땐 지뢰찾기와 스도쿠, 네모로직을 하고 있다. (윈도우 스토어에 마소꺼 지뢰 일퀘있어서 달력 다 채움. 어릴때부터 부산하고 힘들땐 속으로 주문을 걸었다. 클리어하면 오늘밤 편안해질꺼라고.)


동생은 어제도 익숙한듯 요 몇개월간의 우리 사진들을 인화해서 우체국에 갔다. 덤덤하고 산뜻하게 내게 보고함으로써 듣는 내가 감정적으로 힘들어하거나 죄책감느끼지않게 배려해줌을 꼬박꼬박 느낀다. 아프고 예쁘고 미안하고 고맙고 세상의 온갖 감정들이 아직도 맴맴 돈다.




마모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걸


주말에 주택가 사이 숨어있던 빈티지샵을 찾으러가는데 길치자매라 익숙하게 지도앱을 켰다. 보다 야무진 캐릭터쪽인 동생이 앱을 키고 '분명히 여긴데'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갸우뚱거리면, 절대 없을 것 같은 식당 주차장까지 내가 두리번거리고서야 '사라진걸까?'하고 아쉬워한다. 그 후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단 미리 찾아둔 음식점 가볼까?'라며 환기시킨다. 가게 사장님이 직접 연출한 소품들에 감탄하고, 만족스럽게 비워낸 빈 접시 앞에 앉아 다시 대화한다. '우리 다시 가서 찾아볼까?' 지치지도 않고, 귀찮은 기색없이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도 모르게 또 찾아나섰다.


아쉬워서 다시 가서 그 길을 따라 찾아보니 대화하느라 그 눈에 띄는 가게를 못 보고 지나쳤더라. 하하. 찾아서 신나고 둘 다 못 발견한 건 또 웃기고.


동생은 어렵게 찾은 그 빈티지샵에서 색이 많이 바랜 얇은 금색시계를 한참을 들여다보다 샀다. 손가락도 손목도 워낙 얇아서 할머니께서 물려준 반지 스타일들은 맞지않아 내려놓는다. 평소에 그렇게 사랑스런 촌스러운 물건들을 좋아한다. 이런 물건들은 당시엔 무척이나 화려한 물건이었을텐데 시간이 묻어나면 어딘가 애틋하고 따뜻한 냄새가 난다.




중고서점에서 찾은 1400원의 행복. 낡은 영문 삽화서적 :)

서른이 넘어도 골목탐험 할래


괜히 소품샵에 가서 촌스러운 유리잔에 꽂혀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아동용 귀여운 이불들을 보고는 '저걸 덥고 자면 어른병 낫나?'하며 웃고. 다른 한 명은 '그것도 나쁘지 않네.'라고 말한다. 20대엔 무조건 모던하고 심플한 것이 좋았던 우린데. 이런 것들엔 무언가 고집이 한 풀 꺾이고 다양한 것들이 예뻐보인다. 이후엔 동생 손에 이끌려 중고서점가서 1400원짜리 레트로 영어 삽화책 하나 사고선, 최고의 소비라며 같이 뿌듯해했다.


괜히 책 드르륵 펼치며 먼지 테러하고, 검은 것이 묻어있는 동화책 내밀면서 이거 분명 코딱지라고 웃는 데이트. 이사 얼른 가서 같이 언니집 컵이랑 조화 꾸미자고, 고양이들도 인간언니도 행복하라고. 편안한 사람. 틀린 것과 다른 것에 크게 개의치않는 관계.






서른은 좀 더 어른인 것 아니었어?


내가 30대가 되면 엄청 늙거나 그만큼 성숙한 어른이 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내 30대가 아직은 그렇게 멋있지 않다. 괜스레 돌아보고 스스로가 아팠던 기억들을 곱씹는 사람이 되었다. 충돌하는 미지의 인연들을 두려워하고 새 계절들이 마냥 설레지도 않는 재미없는 사람.


어릴 때는 그랬다. 매년 동급생들이 바뀌고, 새로운 선생님이 있고, 매일 같은 풍경의 놀이터도 밤늦도록 새롭고 재밌었다. 조금 더 머리가 자란 후엔 이 곳 저 곳에서 새로운 인연들이 가만히 있어도 계절처럼 교통사고처럼 찾아들었다. 그래서 어제를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깨지는게 싫었던 유리컵이 좋아진다.


조금 촌스럽고 예쁜 티스푼과 유리컵들을 낱개로 볼때마다 사놓고 싶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한개씩 나도 뭐가 어떤 디자인인지 모르고 주고싶다. 내 사람의 어떤 하루에 늘 먹던 음료를 그 컵에 따랐을 뿐인데 괜히 기분이 좀 간지럽고 피식 웃음이 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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