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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사람 Dec 11. 2020

종이인간을 찢고 때렸다.

손쉽게 찢어지는 종이인간으로 나타나서 날 괴롭히던 당신을

창문밖을 응시하며 오후가 흘러가던 중, 건너편 집에서 종이로 된 여자가 걸어나왔다.


초면의 낯선 얼굴이었지만 단박에 알았다.

그 여자다. 이제 그립진 않은 여전한 그도 곁에 있었으니까 확신했다.


긴 시간을 고민한 것 같은데 느린 걸음으로 여전히 그들은 건너편 집에서 막 나와 짧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문을 열고 달려가 떨리는 마음처럼 볼품없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큰 소리를 쳐봤다. 콧방귀도 끼지 않는 종이로 된 그녀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형편없는 여자라며 담백하게 나를 비웃고는 그의 팔을 종이로 된 팔로 감았다.


나는 있는 힘껏 그녀의 종이로 된 어깨를 붙잡아 세우곤 바들바들 떨었고, 그녀의 어깨는 내가 쥔 모양으로 바스락 구김이 갔다.


아랑곳않는 어깨가 구겨진 그녀와 몇발자국 멀리서 제3자인양 미동없이 내 발악이 끝나길 기다리는 그를 보고, 다시 한 번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 어깨의 연결점이 찢어졌다. 덜컥 놀랬지만 둘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가 망가지는 모습을 비웃었다.


정신없이 손에 잡히는대로 찢다가 얼굴만 남아버린 종이로 된 그녀를 보고 나는 멈칫 굳어버렸는데, 방관하던 그가 오더니 '아 끝났네'라고 말하곤 엉망으로 덩그라니 남은 종이 얼굴을 밟으려다 그 마저도 관심을 잃은듯 훽 돌아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얼굴만 남은 그녀는 바닥에 펼쳐진채 여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아직 이 종이여자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었지'라는 상식이 떠오르고, 찢어진 조각들을 모아 두 손바닥에 품고 건너편 집의 닫힌 현관문 앞에 놓았다.


여전히 내 부아를 치밀게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정신없이 다 찢어놓고도 마지막에 돌연 가지런히 모아 원래 자리로 갖다놓고서야 내 집에 들어가 울었다.


실제로 먼저 걸려온 전화에 욕 한 번 못 하고 오히려 당돌하게 쏘아오는 말을 듣더니, 꿈에서조차 종이로 된 그녀를 마저 찢지도 못 하는구나.


차라리 그녀가 아니라 내가 종이로 된 여자였다면 참 쉬웠을텐데.


꿈에서 깬 아침 멍하니 누워 생각했다.


우연히 며칠전 불필요한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이 가르쳐준 귀책 사유가 있지만 별 다른 대가없이 모든 것에 지쳐 합의이혼을 해 줬던 그와 그녀의 평범하게 꿀 떨어지는 일상을 봤다.


그의 양육 의지가 없어보였던 함께 5년이상 살아온 고양이 두마리를 불온전한 상태로 꺾여버린 나라도 데려왔다. 그 둘은 내가 발품팔다 찾았을 때 쾌재와 으쓱함이 가득했던 그 집, 정신이 나간 날 가둔 예쁜 병동이 되어버린 그 집에서 내가 처음 외모에만 반해 반려고양이를 공부하게 만든 교배와 분양이 까다로운 품종의 고양이를 두마리 데려와 꽁냥대고 있었다.


이 남자는 나와 살며 군입대전부터 서른이 되도록 입발린 몇마디로 내 불안을 무시하고 실컷 방황하고 내가 패닉상태가 되어 헐벗고 경찰앞에서 떨만큼 공포감을 조장하던 그였다. 꾸준한 경제활동과 독립한 성인의 비용, 가계를 기혼 6년이 흘러서야 1년여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뒤 냉큼 회사에서 두번이나 바람을 피우고 그 바람조차 발뺌하고 놀란 나를 정신이 나갔다고 말했던 남자다. 그 곁에 그녀는 이 남자를 통해 '언니 남편과 같이 일해요. 언니랑 진짜 친해지고 싶어요.'라는 말을 여러차례 전해왔던 여자다.


그와 내 지난 결혼에 미련이나 그리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덧 숙려기간 포함 1년 반이 흘렀고, 지난 결혼으로 우울증과 몰래 숨어하던 자해가 생겼던 시점도 6년전이다.


겨우겨우 그 지옥에서조차 떠밀려나옴에 절망하고 나는 계속 살아갈 것이고, 사는 것을 받아들이고, 내가 살길 바라주는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조금씩 연장되는 삶에 순응해가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완벽하지 않고 느리지만, 잘 변화해가고 있다 스스로를 질책할때마다 다시 격려했다.


나는..

아무도 부서지거나 죽길 바라지 않는다.

우발적인 해코지도 계획적인 해코지도 칼을 돌려 들고 헤집을 나약함이 우습고 유일한 들려진 무기다.


정신없이 굶고 일과 수면을 생존과 생계에 대한 책임을 지기위해 필사적인 것이 최선의 악바리짓이다.


내 기억창고가 컴퓨터 하드드라이브여서 필요없는 파일과 바이러스를 지우고 치료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마저도 안 되면 수십번 해 본 포맷 귀찮음 하나 없이 할 수 있는데. 인간의 뇌란 내가 처음 만났던 플로피디스크보다 멍청하면서 고무 냄새가 진동하는 타이어보다 훨씬 질기다.


바보같다.


그래도 내 꿈에 종이로 나타난 그녀를 보고 꿈속에서라도 마음껏 찢어보고 소리쳐보고 다시 포개어 멀쩡히 살아주길 그녀가 나온 집앞에 놓아주고 오고서야 허망하고 우스운 이야기구나 싶어진걸보니 뭐라 표현할 수 없이 괴로워 떨고 울면서 일을 하고 고양이 밥과 용변을 처리하던 며칠보다는 산뜻해진 나인걸까.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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