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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사람 Apr 25. 2022

귀여운 주제에 늠름해

닿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존재

어릴 때부터 소녀가장으로 부모님 빚 때문에 이사를 정말 많이 다녔었다. 아무래도 소년소녀가장 앞으로 주택공사에서 빌려주는 전세금 한도와 나보다도 어렸던 동생들의 학교, 복잡해보이는 전세 계약 내용에 어른없는 애들만 임차인으로 두기 꺼림직했던 부분 때문에 선택지가 없었다. 그저 한도내에서 지금 집에서 가까우며 우리끼리 사는 여러가지에 불만이 없는 빈 집이 있어 다행이었다.


23살때 처음 동생들과 따로 살기로 맘 먹고나서는 짧게는 3개월에서 길어야 2년을 한 집에 머무르며 이사를 다녔다보니 발품도 다음 살고 싶은 지역 조사도 참 많이 했다. 다행히 난 이게 재밌었다. 좁은 서울에서도 동네별로 장단점 그래프가 다양했고 산책길의 풍경도 군것질 대장정도 조금씩은 달랐다. 집 자체가 엄청 훌륭한 집을 찾는게 아니다보니까, 이사주기가 돌아오는건 설레는 일이 되었다. 다음 집은 어떤 동네, 어떤 집에서 살아볼까- 돈을 더 지불하고 그만큼 좋은 집이나 좋은 동네를 골라볼까 다음 2년의 일상에 사치를 좀 부릴지 절약을 해볼지 모두 내 선택이라는게 받아들이기 편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는 주변에 시장이 많고 어르신 분들과 자취를 막 시작한 청춘들만 있고 중간 세대는 적은 동네다. 그래서 부동산이 상대적으로 착한 가격에 책정되어 있다. 물론 먹거리도 다양하고 물가도 맘 먹기 나름으로 저렴한 편.


동대문구와 중랑구를 이어주는 작은 다리. 아래로는 중랑천이 흐른다.


목적지 딱히 없이 1-3시간 산책할 요량으로 집을 자주 나선다. 집 바로앞 대로에서 우측으로 가면 10분안에 작은 천과 다리가 있어서 확실한 환기가 필요할 때 쓱- 걷다오기 좋고 물멍 하늘멍 도로멍 다 되서 좋다.

반대로 좌측으로 걷다보면 나름의 이 구역 번화가들이 나온다. 아울렛, (술)먹자골목, 소규모 시장들. 괜히 즉흥적으로 돈을 쓰고 싶으면 아울렛으로 가고, 젊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인 그 즐거움을 스치듯 지나가려면 먹자골목, 사람사는 냄새와 군것질이 필요할 땐 시장투어.


그리고 동네에 더 정이 든 이유중 하나가

이 모든 코스에서 만나는 고양이들이 건강해보인다.

물론 주거지역의 어르신 분들중 당연 싫어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이해하는 부분이라 집근처에선 간식을 안 들고 다닌다. 나조차도 우리집 고양이들 새벽에 매일 우다다하거나 나 깨우면 종종 피곤해서 인상쓰는걸.


여튼 그 여러코스에서 만나는 고양이들에게 내 마음대로 닉네임을 붙인다.



얘는 먹자골목 곱창집에서 잘 챙겨주시는듯한 "귀여운 늠름씨"


"귀여운 늠름씨"

귀여운 주제에 늠름한 턱시도 고양이다.


얘는 확실히 사람들이 한창 술 먹으러 가는 시간에 먹자골목에 가면 딱 곱창집 앞에서 저러고 있다. 영상을 못 올리는게 아쉽다. 굳이 귀여운을 붙인 이유는 영상이 더 확실한데. 끈 달린 복조리 모양 가방을 메고 산책하다가 늠름씨 앞에 늘 하던대로 몇 걸음 물러나서 쪼그리고 앉아 눈을 느리게 꿈뻑이며 눈인사를 건넸다. 그랬더니 지체없이 다가와선 내 가방의 끈을 강아지풀 마냥 혼자 잡고 흔들고 놀았다. 아무 생각없이 사고 결제취소 타이밍 놓쳐서 받아버린 가방인데 귀여운 늠름씨 덕에 갑자기 '이 가방 가치있네?'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샌가 가게사장님도 뒷짐지고 나와 인자한 미소를 띄운 채 구경하고 계셨다. 사장님께 꾸벅, 늠름씨에게 꿈벅 인사를 하고 마저 걷는 나머지의 산책이 또 두근두근 행복했다.


사람들 모두에게 이런 귀여운 주제에 늠름한 존재가 하나쯤 있다면, 분명 어떤 상황에도 바싹 메마르진 않을테지. 다음에 보러왔을 때도 귀엽고 늠름했으면 좋겠다. 나보다 한참 작은 늠름씨지만 오늘도 행복하고 여전하단 말이니까.


나는 나의 귀여운 ㅇㅇ씨들도 정말 소중하고

내 사람들의 귀엽고 편안한 ㅇㅇ씨가 될 수 있다면

참 다행이고 행복할거라 생각해


귀엽다고 생각하는 건 대상을 바라볼 때 약간의 포용을 포함한 애정을 느끼고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서 자주 느끼고 싶다. 조금 무거운 애정은 자칫 원치않게 힘들어졌을때 가장 든든할 수 있는 만큼 가장 무서운 칼날이 되기도 했으니까.


그런 것들이 어렵고 주저되서 어쩔 수 없이 움츠러들땐 적당히 소극적인 상태로도 괜찮으니까 내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찾아 걸어 보는 건 어떨까.


점점 무뎌지는 감정이 씁쓸한데 엄두가 안 난다면,

보고 느끼고 먹고 쉬는 군것질이 딱이다.


좀 더 크고 대단한 게 간절해서 서두를 필요는 없다. 타이밍이라는 건 어떤 대상이나 시기는 물론이고 나에게도 준비가 되어있을 때 의심없이 뛰어들어 안고 안길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상태를 말한다. 준비와 연습을 하고싶다면 가능한만큼 하면 되고, 무리하고 있다 느낀다면 쉬어도 되는 내 자유다. 나의 선택에 걱정과 의심, 의문보다는 내 감정과 기분을 믿어주자. 내 선택들의 실패엔 산뜻하고 따뜻한 격려를, 성공엔 자랑스럽게 화끈한 축하를 할 수 있는 내 편인 내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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