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의 여인들
> 앞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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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되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고 변변찮았던 스물 아홉에 나는, 에라이 모르겠다, 시집을 갔다.
터키 깡시골에서 운명처럼 만나 친구가 된 지영은 잘 다니던 병원을 그만두고 스물 아홉에 호주로 유학가더니 이년 후 졸업을 하고는 그곳에 안착했다.
올해 대학 2학년인 80세의 큰 이모는 이렇게 말했다. "대학원 가. 대학원 가서 공부해. 내가 네 나이면 하늘의 별도 따겠다."
별을 딸 나이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때가 그때였다는 것을 나는 매번 그때가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부동산 상승론자들은 이렇게 말하기 좋아한다. "부동산은 오늘이 가장 쌉니다." 부동산이 오늘 가장 싼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가장 예쁜 날은 오늘이다. 우리는 오늘 가장 예쁘다. 오늘 가장 젊고, 내일이면 오늘보다 덜 예쁘고 더 늙어진다. 오늘을 즐겨야 한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뻔할 뻔자 진리를 이제야 알게 되다니, 분하다.
치의 집에 도착했을 때, 치와 네 명의 서양인들은 한창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지영과 나는 오는 길에 간이식당에서 볶음밥과 볶음면으로 점심을 먹은 터였다. 그 간이식당이라는 곳은 소위 데이트립으로 트래킹을 할 때 가이드 여인네들이 관광객들을 데려가는 그런 곳이었다. 대나무가 떠받치고 있는 파란 비닐 천막 아래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를 갖다 놓고 장사하는 곳. 볶음밥과 볶음면이 먹고 싶어 고른 것이 아니라 볶음밥과 볶음면 밖에 없어 볶음밥과 볶음면을 먹었다. 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길이 험하고 힘들어 가뜩이나 갈증이 나 죽을 지경인데 점심 이후에는 조미료 폭탄 점심밥 때문에 혀가 말리는 줄 알았다. 그렇게 켁켁거리며 힘들게 집에 왔더니, 치와 네 명의 서양인들은 갖가지 채소 반찬과 함께 하얀 쌀밥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저 노란 것은 분명 두부구이렸다. 다리 길이에서나 출발 순서에서나 여러모로 우리가 불리했다. 분하다.
산을 넘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치의 식구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치의 집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까.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말수가 적고 만사가 언짢은 듯한 표정의 조와의 트래킹이 편치 않았기에, 차라리 수다스럽고 대장부같은 치가 있는 집에 도착한다면 마음이 덜 불편하겠지 싶었다. 하지만 드디어 집에 도착했을 때 지영과 나는 트래킹을 하며 보낸 지난 반나절의 시간에서 느꼈던 어색함보다 몇 배는 더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어쨌거나 지영과 나는 그들의 손님이었고 그곳은 남의 집이었다. 헌데 '어디 앉아라.' 혹은 '좀 쉬어라.' 같은 말은 고사하고 어느 누구도 '어서 와라.' '반갑다.'라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집 마당에 도착하는 행위, 그것이 이 사무적인 여정의 끝인 듯 우리를 집까지 안내한 조는 우리를 마당에 내버려둔 채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의 호스트 치 여사는 네 명의 까칠한 서양 손님의 쌀밥 위에 반찬을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치의 남편은 치의 시중을 들며 화로와 부엌과 식탁 사이를 다소곳이 그러나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그곳에는 지영과 나처럼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잔뜩 움츠리고 주눅이 든 이가 한 명 더 있었으니, 바로 치의 며느리였다. 앳된 모습의 치의 며느리는, 마치 이제 막 전혀 모르는 남의 집에 도착해 어색한 쓴 웃음만 흘리고 있는 내 앞에 있는 지영 만큼이나 치의 식구들과 서먹해 보였는데, 그런 그녀를 보니 처음 단양에 가서 예비 시댁 식구들에 둘러싸여 있던 이십 대의 나를 보는 듯 하여 몹시 애처로웠다. 하여간 메리비안의 법칙이니 초두효과니 따위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꿔다 놓은 보리짝 마냥 뻘쭘하게 서성이게 된 것이다. 사실 치의 가족들을 대신해 변명을 좀 하자면 '어디 앉아라' 라고 권할 수도 없었던 것이 딱히 어디 앉을 데가 있지도 않았다. 의자라고 생긴 것은 집 한가운데 놓인 밥상 앞 앉은뱅이 의자 몇 개가 전부였는데 그것들은 지금 기럭지 긴 네 명의 서양인들의 거대한 엉덩이를 떠받치고 있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치의 집을 나갈 때 보니 아랫마을에는 시멘트로 지은 번듯한 집들이 꽤나 있었다. 마당 뷰.
치네 집은 이렇게 생겼다.
치의 손자 주. 치의 남편 이름도 주, 치의 아들 이름도 주. 아이는 오 분 후 바로 저 자리에다 오줌을 쌌다.
시월드의 우리의 며느리.
이 사진은 '이층'에서 찍었다. 직각으로 세워진 대나무 사다리를 타고 오르면 이층이다. 문 없이 모두 다 오픈되어 있다. 저 아래 가운데 윗부분이 화로, 가운데는 거실 겸 식당, 이층 아래에 부엌살림살이가 있다. 치네 가족은, 치, 치의 남편, 큰 딸, 큰 사위, 큰 아들, 며느리, 둘째 아들, 둘째 딸, 셋째 아들, 큰 손자로 총 열 명. 우리에게 이층 전체(전체라고 해봤자 송장 자세로 누우면 네 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크기였지만)를 내주고 남은 공간이라고는 화로 옆에 판자로 막아 놓은 채 한 평도 되지 않는 평상과 그 위에 깔린 이불이 전부였기에 도대체 열 명의 식구들이 어디에서 잤는지 알 수가 없다.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우리가 먼저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은 치는 서양인들을 데리고 오후 트래킹을 떠났다. 그들을 사파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 치의 임무였다. 남겨진 우리는 우리가 이제 막 맞닥뜨린 치의 집과 치의 가족과 우리 모험심의 한계에 당황하여 드디어 우리 차지가 된 앉은뱅이 의자에 간신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언니, 여기서 잘 수 있겠어요?"
자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곳에서 자지 않으면 그 험한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 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어. 너는?"
"언니가 잘 수 있으면 저도 잘 수 있어요."
"좋아."
"언니."
"응."
"언니 여기서 며칠 있을 생각이예요?"
지난밤 분홍색 헬멧을 쓰고 득달같이 달려온 치의 현대적 기동성과 물 흐르듯 이어진 대화에 매료된 나는 베트남 산간 마을 소수민족 여인의 집에서의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은신을 상상하며 한 이삼일 지내다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상상에는 치를 소개한 열여덟 살 독일 아이의 이제 막 샤워를 끝낸 듯 싱그럽고 말간 얼굴과 만족감에 반짝이던 투명한 눈동자가 남긴 깊은 인상이 한몫했다. 치의 집에서 묵는다면 우리도 그 아이의 눈빛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나중에 지영과 나는 각자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기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슬프게도 그것은 놀랍도록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도 짐작했듯이 상황은 우리의 기대와는 완벽히 상반된 모습으로 실현되고 만다. 하여 지금처럼 치를 떠올리며 글을 쓰거나 '사파'라는 말만 들어도 나의 눈빛은 쌀뜨물처럼 한없이 탁해지고는 하는 것이다.
"그걸 뭘 물어. 하루지. 왜, 너는 더 있으려고?"
눈빛이 탁해지는 이유는 물론 후회에 있다. 지금 나를 치네 집에 데려다 놓는다면 치의 남편 주와 함께 저녁 준비를 하고 치의 딸 쩌와 뒷동산에 오르고 치의 아들 주의 세발자전거를 신나게 밀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당장 이 낡고 누추한 집과 어색하고 불편한 공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근데 샤워하는 곳은 없는 거 같지? 화장실은 어떨거 같아? 아, 오줌 마려 죽겠는데 못 가겠어. 지영 너 먼저 가봐."
시멘트 바닥에 직사각형 구멍이 뚤린 변소의 한쪽 구석에는 세수대야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서 미꾸라지들이 힘차게 꿈틀대고 있었다.
"언니, 우리 가방에서 아무것도 꺼내지 말아요. 나 세수 안 하고 이도 안 닦고 잘 수 있어요. 우리 가방에서 아무것도 꺼내지 마요."
"좋아."
집안일은 남자가 한다. 밥하기, 애보기, 불 꺼트리지 않기, 모두 다 남자의 몫이다. 한국의 전통적 가부장제에서의 여자의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치가 새벽같이 밭일을 하러 나갔을 때 집을 지키고 아침밥을 준비한 것은 치의 남편이었다. 저녁밥상 역시 온전히 그 혼자 차렸지만 그는 식탁에 앉지 않고 부엌데기처럼 화로 앞에 앉아 밥그릇을 들고 밥을 먹었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치의 목청에 비하면 남편 주의 목소리는 개미만큼 작아서 나는 그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대나무관을 타고 집 마당을 지나 집 아래 논으로 흐른다. 이 물로 씻고 밥을 한다.
둘째 딸 쩌는 우리의 관심을 끌고 싶어했다. 우리 앞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고 우리 앞에서 흙장난을 쳤다. 아이는 심심한 듯 보였다.
금이야 옥이야 막내 아들 주. 큰 딸 조의 나이가 스물셋이었던 것 같다. 이 아이는 네 살.
하루만 묵고 다음날 아침 사파로 돌아가겠다는 우리의 말에 조는 집안으로 들어가 사진첩을 들고 나왔다.
하루 더 묵으면 전통 의상을 입고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다며 사진첩을 펼쳐 보였다. 색 바랜 시진부터 최근에 인화한 사진까지 수백 장은 될 듯한 그 사진 속에서 수많은 여행객들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흐몽족 전통의상을 걸치고선 딱 그 독일아이처럼 그렇게 말갛고 백지같은 얼굴로 웃고들 있었다. 강요에 못 이겨 의무적으로 사진첩을 넘겨보는 와중에도, 지금 우리와 달리 마냥 즐거워 보이는 그들에게 질투가 났다. 그러다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길래 그들처럼 즐겁지 않은지 의문이 들었다. 다행이라면 산골마을의 저녁은 금새 찾아왔다. 짧은 오후는 거절을 하며 보냈다.
해가 앞산 너머로 사라질 무렵 우리의 며느리의 남편이자 치의 아들이 소를 몰고 돌아왔다.
불 하나로 이 모든 것을 다 만들어 냈다. 밥그릇은 들고 먹으며, 주인이 반찬을 가득 집어 손님의 밥그릇에 올려 주는 것이 예의인 것 같았다. 치가 두세 번에 걸쳐 우리의 밥그릇에 반찬을 올리며 많이 먹으라 독려했다.
식탁에는 나와 지영, 치, 그리고 어린 아이들만 앉았다. 다른 식구들은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고 앉아 왔다갔다 식탁을 오가며 반찬을 집었다. 식탁이 좁지는 않지만 어차피 다 함께 앉을 수 없으니 그리 하는 것이 몸에 익은 듯 보였다.
저녁밥을 거의 다 먹어갈 무렵 아랫마을에 사는 이웃이 찾아왔다. 치네 집 근방에 집이 없으니 깜깜한 산길을 얼마나 걸어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웃 여자가 찾아온 이유는 휴대폰으로 받은 문자 메세지 때문이었다. 영어로 된 메세지를 받았는데 읽을 수가 없어 치네 집에 묵고 있는 우리를 찾아 온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제 친구 수잔으로부터 소개 받고 연락 드려요. 수잔이 아줌마 칭찬을 많이 하더라구요. 우리는 모레 도착하고 트래킹을 하고 싶어요. 모두 일곱 명이고 하룻밤 묵으려고 하는데 가능한가요?"
메세지를 들은 이웃 여자의 얼굴이 함박꽃이 되었다. 내가 물었다.
"아줌마, 수잔 기억나요?"
기억난다고 그녀가 대답했다. 지영과 나는 한 사람 당 20만동(10달러)에 이곳에 왔다. 혼자라면 이보다 더 든다. 여기에는 트래킹 가이드, 삼시세끼 식사, 잠자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만 동 이만 동의 작은 차이가 있을 뿐 사파의 거리에서 활동하는 흐몽족, 자오족 여인들은 비슷한 금액을 받는 듯 보였다. 이웃 여자가 수잔에게 받은 돈 역시 10달러였고, 그녀는 내일도 그렇지만 모레도 예약된 손님이 없다고 했다.
"그럼 뭐라고 답장을 보낼까요?"
둥글둥글 선하게 생긴 이웃 여자가 입을 막 떼려는 순간 치가 끼어들었다.
"한 사람에 15달러라고 해!"
이웃 여자의 얼굴에 다시 함박꽃이 피었다. 지영과 나는 동시에 소리쳤다.
"그럼 안돼요. 수잔이 친구들한테 아줌마를 소개하면서 10달러라고 말했을텐데 15달러라고 하면 아줌마한테 오지 않을 거예요. 일곱 명이나 되는 단체 손님을 놓치고 싶어요?"
우리의 말이 그럴 듯 했는지 치는 고개를 끄떡이며 맞는 소리라고 맞장구를 치더니,
"그럼 13달러 달라고 해!"
라고 소리쳤다.
"나참, 그게 아니라니까요. 수잔한테 받았던 것과 똑같이 10달러를 받던가, 일곱 명이나 되니까 10달러보다 좀 더 깎아주던가 그래야 오죠!"
이웃 여자는 세상사에 있어 치보다 덜 닳은 듯 보였다. 그녀는 그저 치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치는 이번에도 옳거니 맞장구를 치더니 12달러라고 답장을 보내 달라고 우리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우리는 이웃 여자에게 치의 말대로 답장을 보내고 싶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모레 가능합니다. 한 사람에 12달러입니다."
이런 비지니스는 여자들의 몫이었다. 치네 집 남자들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숨을 죽이고 저쪽에서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당사자 외에 치와 큰딸 조였다. 지루한 몇 분이 지나고 답장이 왔다.
"오, 제가 알고 있는 가격이 아니네요. 저희는 일곱 명이나 되는데 말이예요. 음, 알았어요,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우리가 뭐랬어요. 그냥 10달러라고 하라니깐..."
후회하는 구석 하나 없이 치가 말했다.
"그럼 11달러라고 다시 문자 보내 줘. 다른 사람 찾기 전에 어서."
딱하기로는 이웃 여자 못지않게 치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여간 딱했다. 치가 시키는대로 메세지를 보냈지만 밥상을 물리고 어린 아이들이 하품을 쩍쩍 해댈 때까지 그들로부터 어떤한 답장도 받지 못했다. 이웃 여자는 전화기를 손에 꼭 쥐고 앉아 우리와 눈이 마주칠 때면 그 선한 얼굴로 배시시 웃음을 지었고, 그렇게 한참을 있다 집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지영과 사파에 대해 혹은 베트남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여행하며 우리가 마주했던 그 수많은 바가지와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우리 앞의 거대한 장벽과 넘지 못할 경계에 새삼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했다.
이웃 여자가 돌아간 후에도 가족들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피곤했던 우리는 아침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아슬아슬한 사다리를 오르는 우리의 엉덩이에 대고 치가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새벽 일찍 논에 나가는데 너희는 우리 신경쓰지 말고 푹 자. 알았지? 푹 자고 일어나 아침 먹고. 잘 자!"
이층에는 언제 빨았는지 알 수 없는 두터운 밍크담요가 여러 채 쌓여 있었다. 우리는 옷을 몽땅 입고 가능한 맨살이 담요에 닿지 않게 노력하며 자리에 누웠다. 내 옆에 지영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는 빨리 잠이 들기를, 눈을 감았다 뜨면 사파의 어느 호텔 앞이기를 빌었다.
다음날 새벽.
자기네들 신경 쓰지 말고 실컷 자라고 하더니, 치는 새벽 네 시부터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소리로 가족들을 깨우고 지시를 하고 농기구를 꺼내며 난리를 피웠다. 치의 목청에 놀라 벌떡 깬 우리는 그 분주한 아침의 소리를 오롯이 들으며 도저히 오줌을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자리에 누워 있었다.
밤새 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짙은 안개에 땅도 나무도 치네 집도 축축히 젖고 말았다.
학교 가는 길. 아이들은 자기 발보다 큰 쓰레빠를 신고도 다람쥐처럼 바위 사이사이를 구르듯 내려왔다. 베트남 시골 초등학교의 등교시간은 아침 7시라고 했다. 새벽부터 농사일 하는 부모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지 싶다. 초등학교 일 학년인 둘째 아들의 손에 아빠 주는 만 동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 보냈다.
형은 학교에 가고, 누나는 엄마 따라 밭에 가고, 아빠와 둘이 남은 금이야 옥이야 막내.
시엄마를 따라 새벽에 논에 나갔던 며느리가 돌아왔다. 왜 혼자 왔냐고 물었으나 그녀는 웃기만 했다.
그녀는 화로에 물을 끓여 대야에 부었다. 그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셔 야무지게 짰다. 꼭 짠 따뜻한 수건으로 아이의 얼굴과 목과 손을 차례대로 닦였다. 그 수건을 빠니 맑았던 대야의 물이 금새 땟물이 되었다. 수건을 다시 야무지게 짜서 이제는 아이의 발을 닦였다. 수건이 들어간 대야는 이제 흙탕물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물을 벌릴 때가 아니었다. 수건을 꼭 짜서, 이제는 엄마 차례. 얼굴을 닦고 팔을 닦았다. 다시 대야에 수건을 빨고 꼭 짜기를 반복. 발을 닦았다. 이제 대야를 비울 시간이다.
우리가 아침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치는 논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논에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논일을 마치고 곧장 사파의 거리로 일을 하러 나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여간 치의 얼굴을 본 것은 지난 밤이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조와 계산을 치르고 마을을 내려갔다. 마을에서 사파까지는 치의 아들과 사위가 모는 오토바이 두 대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치네 오토바이는 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산중에 있는 치의 집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갈 수도 없거니와 세워 놓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토바이에 배낭을 막 실으려는데 조가 말했다.
"오토바이 타는 값은 따로야. 한 사람당 오만 동."
그렇다. 끝이 이랬다. 오토바이를 타지 않고 걸어서 사파로 돌아간다고 했다면 끝이 달랐을까. 오만 동. 이천오백 원에 가슴이 철렁하긴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사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