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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Mar 14. 2023

혹독한 채찍질은 성장에 도움이 될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얘기야"라는 말이 틀릴 수 있는 4가지 이유

벌써 수년 전의 일. 박사과정 동안 나의 스터디메이트였던 H와 나는 그날도 H의 집에 모여 앉아 자신의 랩탑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사담은 생략하거나 짧게 줄이는 비즈니스 관계! (실은 여전히 가깝게 지내고 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가득하던 차에 잠깐의 쉬는 시간. 나와 H는 같은 학교에서 비슷한 시기에 석사과정을 마쳤었는데, 이야기는 흘러 흘러 그 시절에 도착했다.  


그는 석사과정 시절을 떠올리며 선배들과 지도교수로부터 제법 혹독한 평가와 비판을 받았던 것이 그의 학문적 성장에 도움이 많이 됐다고 얘기했다. 특히 H가 한국에서 마친 석사 프로그램에서는 졸업논문을 교수님들 앞에서 발표하기 전에 동료와 선배들 앞에서 먼저 발표한 뒤, 의도적으로 신랄하고 강도 높은 비판을 받는 전통이 있다고 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많은 배움을 얻었던 것이다. 


동의가 된다. 일종의 '매 미리 맞기' 전략이랄까. 논문지도위원인 교수님들에게 비판을 받기 전에 동료와 선배들에게 먼저 예방주사를 맞으면 당장은 따끔하긴 해도 후에 실제 논문발표를 준비함에 있어서는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또한 강도 높은 평가와 비판을 통해 객관적인 피드백을 얻어 논문의 질을 올릴 수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혹독한 채찍질이 언제나 좋은 쪽으로만 작용할 수 있을까. 




내가 미국에서 심리상담을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이 굳어지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 중 하나로는 여러 차례 참관했던 공개사례발표 때문이기도 하다. 공개사례발표란 상담자가 자신이 맡은 내담자 사례를 슈퍼바이저 및 청중 앞에서 발표하고 피드백을 받는 기회를 일컫는다. 공개적인 발표의 자리임에도 일부 슈퍼바이저 선생님들의 피드백은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모진 말 대잔치인 경우도 있곤 했다.  


"지금 이걸 상담이라 할 수 있겠냐고요."

"내가 말 안 하려다 선생님 위해서 하는 건데.. 이건 누가 내담자인건지 구분이 안 가요." 

"본인이 잘못해서 내담자가 더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물론 슈퍼비전은 상담자의 부족한 점이나 상담자가 놓친 부분을 일깨워 내담자에게 가장 최선의 상담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해주는 중요한 과정이다. 내담자에게 양질의 상담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적이기에 동료 및 슈퍼바이저로부터 받는 객관적이고 엄밀한 평가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지나치다 싶은 처사들도 있었던 것. 많은 사람들 앞에서 비판을 넘어선 비난에 맞닥뜨린 발표자 중에는 발표를 마치고 상처를 토로하며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었다.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교육이라는 것이, 성장이라는 것이 꼭 이런 가혹한 방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까. 더군다나 다른 분야도 아닌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심리상담 분야에서의 교육방식이 꼭 이래야 하는 걸까. 이 방식이 상담자의 역량을 기르고 상담의 질을 향상하는데 효과적일까. 그니까, 이게 정말 최선의 방법일까.




그래, 이게 최선이다, 라고 말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이럴 수 있다. 컴포트존(comfort zone)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외부의 몰아붙임이 필요하다고. 즉 현실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서는 적당한 칭찬이나 입발린 말보다는 그보다 훨씬 강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거다. 그게 본인 스스로에 의해서든 타인이나 외부의 다른 자극에 의해서든. 


"There are no two words in the English language more harmful than 'Good job.' "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고 해로운 말은 '그만하면 잘했어'야."


영화 위플래쉬에서 적당히 좋은 건 용납할 수 없는 최고의 지휘자이자 폭군, 플레쳐 교수의 대사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밴드에 새롭게 들어온 드러머 앤드류를 극한으로 몰아붙인다. 그 과정에서 그는 가학과 폭언도 서슴지 않는다. 궁지에 내몰리고 악에 받친 앤드류는 순간적으로 광기에 휩싸여 자신의 역량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게 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라고 철학자 니체도 말했다. 정신장애로 고통받던 말년의 그가 기록한 말임을 생각해 볼 때, 여기서의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을 타인의 비판 또는 비난 정도의 시련과 동일선상에 놓기엔 좀 무리는 있겠다. 그럼에도, 시련이든 역경이든 결국 그것을 마주하고 이겨냈을 때 우리는 더 강해지고 비로소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다는 말로 꺾어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당신 잘 되라고 한다는 그 혹독한 비판들이 언제나 정답이 아닐 수도 있는 이유들이 있다. 


1. 포장지와 내용의 구분

적절한 비판과 채찍질은 성장에 꼭 필요한 요소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형식과 내용을 구분하지 않는 우를 저지르곤 한다. 칼이 서린듯한 엄정한 내용의 비판일지라도 그 내용을 담는 포장지가 무례함 또는 인격모독으로 나타날 필요는 없다. 전달하는 내용에는 필요한 비판을 켜켜이 담되 상대를 향한 존중과 최소한의 예의로 그 내용을 포장할 수 있다는 얘기다. 


2. 선한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바탕 혹독한 피드백을, 또는 물은 적도 없던 충고를 쏟아낸 다음 뒤따르는 말,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얘기야". 이렇게 말하는 이의 의도는 충분히 진심일 수 있다. 정말 상대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선한 의도로 하는 말일 수 있다. 아니, 아마 정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선한 의도가 언제나 선한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원치 않거나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의 좋은 의도만을 앞세우는 비판과 충고는 환영받기 어려울뿐더러 상대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상대방은 원하지 않는데 혼자 좋은 의도랍시고 충고하고 열을 올리다 섭섭하고 실망하는 이들도 종종 본다. 이들은 선한 '의도'만을 신봉하는 자들일테다. 


3. 긍정적 효과와 부작용의 저울질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채찍은 도움이 된다. 여전히 누군가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런 충격요법의 긍정적인 효과가 부작용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긍정적 효과와 부작용을 간단하게 평균치로 내서 계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평균치가 양수라고 해도, 여전히 효과가 있는 동시에 부작용과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게다가 효과가 더 클지 부작용이 더 클지는 그 비판이 가해지기 전엔 알 수 없다. 꼭 한 번 더 신중해야 할 이유다. 


4. 성장에 있어서 개인 간 차이

성장과 관련된 여러 특성에는 당연히 개인차가 있다. 기질적으로 성장지향형인 사람이 있는 반면 현실안주형의 사람도 있다. 봐줘서 "성장은 좋은 것이다"라는 명제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결국 성장하고 싶은 총량은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강요받을 수 없다.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적당한' 수준의 자극과 채찍질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적당함'의 수준이 사람마다 같을 리 없다. 많은 비극들은 내가 겪은, 또는 겪어낼 수 있는 그만큼의 '적당한 혹독함'을 남에게 그대로 시전 할 때 시작된다. 현실은, 그만큼의 혹독함을 상대방도 원하고 있는지, 상대방이 감당해 낼 수 있는지는 쉽게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혹독한 비판을 나 또는 상대를 위한 성장의 도구로 고려할 때, 먼저 생각해 볼 요소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먼저는 안전감이다. 이 안전감이란 신체적 그리고 심리적인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안전감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무수히 많겠으나,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과거의 경험이다. 언제나 평가적인 말을 들으며 자라야 했던 가정환경, 대드는 건 생각도 못할 정도로 무서웠던 학교 선생님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었던 경험 등. 이런 과거의 경험을 지닌 사람들은 외부의 평가와 비판에 더욱 민감하고 취약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혹독한 평가가 성장의 발판이 되기보다는, 보다 많은 경우에 안전감을 해치는 위협에 불과하다. 


두번째는 자율성이다. 자율성 없는 노력과 분투를 통해 한시적 성취는 얻을 수 있을지언정 지속적인 개인의 성장으로 나아가긴 어렵다. 결국 피드백이든 비판이든 채찍질이든 가시밭길이든, 그걸 감내하고 받아들이기로 스스로 "선택"한 이들이 그걸 실제로 감당해 낼 가능성이 훨씬 높은 셈이다.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도 상대방의 자율성을 지지할 수 있다. 먼저 물어보거나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피드백이든, 평가든, 비판이든, 업무상 또는 상황상 필수적인 게 아니라면 선택사항으로 남길 수 있다. "나에게 이런 충고 또는 피드백이 있는데 한 번 관심 있으면 들어보겠냐"라고 물어보는 일. 선택의 공을 상대에게 넘김으로써 우리는 상대의 자율성을 지지하고 마음의 저항감을 줄여줄 수 있다. 상대가 응하면 예의라는 포장지에 담아 잘 전달하면 되고, 상대가 거절하면 깔끔하게 돌아서면 된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서일까. 리스크가 뒤따르는 모험도 사람 사이의 갈등도 피할 수 있다면 더 피하고 싶어진다. 몸도, 마음도 아프거나 힘들지 않고 싶고 상대에게도 그런 짐을 구태여 더하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 어쩌면 '혹독한 비판의 효용에 대해 정중하지만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 글'의 시선은 교육자로서의 철학이나 다짐이라기보다는, 성장이 아닌 안정을 추구해 가는 나 스스로를 다독이는 합리화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학창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잘해주던 선생님이 아니라 그-렇게 매를 때리고 혼구녕을 내던 선생님이라고들 해도. 따끔함을 넘어선 혹독했던 질책이 내 삶의 양분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그럴 수 있다면, 그래도 된다면, 나로서는 그보다는 그 사람의 하루를 잠깐이나마 위로하는 한 줌의 따뜻함을 건네고 가물가물 잊혀져 가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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