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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Mar 06. 2023

서른 즈음에 - 회고

수년 전 한 해를 마무리하며 다른 곳에 써 두었던 내용을 갈무리한 글입니다. 



2018년의 한 해의 끝, 지난 박사생활을 잠시 돌아본다. 박사과정의 세 번째 학기가 끝났다. 일 년 반 동안 나는 열네 개의 수업을 수강하였고, 공동저자로 논문 한 편을 출판했다. 다른 세 편은 저널에 투고된 채로 리뷰 중에 있고, 그 외에도 작업 중인 논문이 서너 편 더 있다. 세 군데 컨퍼런스에서 발표를 했다. 한 과목을 티칭하였고, 지난 학기 세 명의 슈퍼바이지와 함께 슈퍼비전을 시작해서 이젠 슈퍼바이저의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이런 숫자들이 나의 지난 유학생활을, 아니 지난 얼마 간의 삶을 충분히 설명해 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자율성을 보장하는 지도교수님 아래에서 난 좀 더 여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두 돌을 향해가는 아기와 발맞춰 이제 나는 나 홀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가족 안에서 존재하는 사람이 되었다. 누구누구 아빠라는 호칭에 익숙해졌고, 여전히 자다가 여러 번 깨고 마는 아기와 함께 잠을 설칠 수밖에 없는 아득한 밤의 시간에도 제법 적응했다.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는 핑계로 나의 일에는 조금 게으른 사람이 되었다. 나의 서른은 쏜 화살 같았고, 극적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게을리하는 지금, 나는 결국 다시 쓰기로 한다. 적어도 내 안에 쌓여가는 잡념들을 밖으로 꺼내기로 마음먹는다. 배설은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것이 감정이든, 창조물이든, 진짜 배설물이든지.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진다. 잊지 않기 위해, 잊혀지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 셈이다. 벌써 많은 순간들을 유야무야 흘려보냈다. 잊혀진다는 것이 '무'가 된다거나 소멸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경험과 순간들은 그 당시의 나를 형성해 왔다. 또 때로는 잔상처럼 남아 그 이후의 삶에도 영향을 미쳐 왔을 것이다. 

꽤 오래전이지만 유세윤 씨가 MBC 라디오스타 프로그램에 나와 한 말이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정확한 멘트는 아니지만, 이제는 무언가 되어버린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더 이상 스스로가 뭐가 될지 궁금하지 않아져 버린 그때, 우울증이 찾아왔다고 했다. 공감이 많이 됐다. 아직 학생 신분을 유지하며 무언가가 되지 않은 듯한 미생의 내 모습에 안도감이 들고, 결국엔 무언가가 되어버려서 내 삶에 남은 공간이, 여백이, 또 기대가 사라질까 두렵다. 




돌이켜보면, 나의 이십대는 팽팽한 두 욕구 사이를 가로질러 왔다. 특별한 성취를 이루고 싶은 욕구와 소박하고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고픈 욕구. 이 중간의 어딘가를 배회하며 지난 이십대를 보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 다 선명했지만, 두 가지를 함께 이룰 수는 없었던, 그래서 힘들었고 못내 괴로웠던 시간들.

나의 삽십대는 어떨까. 여전히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게 될까.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인생은 욕망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삽십대가 되어서인지,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워서인지, 확실히 이전보다는 안정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어린 날, 위태로운 듯 또 뜨거운 듯 하늘로 달아오르던 나는, 이제는 항해를 마치고 침잠하는 부유물처럼 고요하게 가라앉고 있다. 


지금 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를 더 많이 찾고 발견해야 했던 이십대에는 즉각적인 결과물을 본다거나 설익은 채로 사회에 기여를 하고 싶어 부단히 애썼다.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나의 것, 이를테면 전문성을 갈고닦아야 하는 삼십대에 들어선 나는 이제야 '나를 알아가는 느낌'을 조금씩, 정말 아주 조금씩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조금 뒤죽박죽이 된 것 같지만 아무렴 어때. 처음 사는 인생이라 잘 몰랐는걸. 누구나 단 한 번만을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누구에게나 죽음이 온다는 사실만이 인생의 공평함을 뒷받침한다. 어느 누구도 두 길을 한 번에 걸을 수는 없기에, 그리고 그 길에는 끝이 있기에. 올 한 해에는 내가 선택한 나의 길을 조금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듬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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