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도동 Jun 29. 2024

[일일일글] 바닥 찍고 다시 수면으로

나와 디자인이 처음 만난 날과 앞으로 우리 관계에 대한 고민

오랜만에 돌아온 브런치네요. 퇴사 후, 취업과는 무관하게 배우고 싶어서 캐릭터 제작을 배웠습니다. 모델링 툴도 예전보다 더 잘 쓰게 되었고, 재밌었어요. 이걸 활용해서 취업을 하거나 돈을 벌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재밌어서 배웠을 뿐. 그러나 어른이 되면 재미로만 뭔가를 하면 안 되는 것 같다는 걸 느끼며 처음 느끼는 감정 상태로 몇 달을 지낸 것 같습니다. 너무 깊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항상 생각이 깊어지는 것 같네요.


브런치에 오지 않는 동안 면접을 수차례 보았습니다. 산업군은 이커머스랑 IT였어요. 사실 어딜 가도 디자이너에겐 기획보단 기획안대로 만드는 능력을 보기에 제가 생각했을 땐 디자이너에게 산업군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생각하며 다양하게 넣은 게 사실입니다. 아무튼 과제도 하고 역검도 하며 여러 회사들의 겹치는 채용 과정 속에서 열심히 임했습니다. 준비를 하면서 느낀 건, 면접을 가는 동안 사회인이 갖춰야 할 태도나 가치관 같은 게 제가 가지고 있던 것들과 정말 다르다는 거였습니다. 생각보다 예리하게 준비를 해야 했다는 걸 다시금 느낍니다. 그러면서 포트폴리오와 저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하기 시작했고, 디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까지 이어졌어요. 완전 근본부터 다시 시작하는 고민이죠. ㅎㅎ


채용 과정에서 이렇게 말하면 잘리겠지만, 솔직해져 봅시다. 저는 디자인을 우연히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잡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머니가 미술 하는 딸을 원해서 유치원 대신 미술학원에 갔던 게 그 시작이었어요. 그냥 미술을 하기 시작했고, (물론 중간엔 어머니의 교회 권사님이 하시는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서 미술을 못하게 되었지만) 중학교 때부터 직업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며 다시 미술을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순수 미술과 디자인 입시 둘 중 선택하는 것이었고, 저는 순수 미술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로 디자인 입시를 하게 되었죠. 어찌 보면 어린 시절부터 디자인은 제 꿈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하라니까 했던 것 같아요. 다행히 그림은 잘 그렸고, 아이디어도 좋아서 기발한 그림을 그리면서 그 당시 서울대 입시와 한예종 입시를 준비해서 저는 잘하는 사람인 양 다녔죠. 


그러다 대학에 가니 판도가 달라지더라고요. 디자인은 미술이 아니고, 전공생들은 디자인에 진심이었습니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열정 없는 실력만으로는 그들의 성장을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자아가 별로 없던 저라서,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른 채로 수동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 좋아하고 잘하던 게 남을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꾸준히 했던 활동을 돌이켜보니, 1학년때부터 복지관에 다니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사회적 약자에 관심이 많던 저는 치매 노인분들을 도와 드리고 싶어서 원주 노인복지센터와 협업해 친구들과 치매 예방 프로그램을 만들고 수업을 다녔습니다. 동기 중에 귀가 안 들리는 친구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인사하고, 그 친구가 알듯 모를 듯 열심히 조절해 가며 친해지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3학년 땐, 수업 보조를 하며 도와주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제가 남을 도와주는 순간이 유일하게 내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걸 느끼게 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졸업 전시 주제도 치매 노인을 위한 교구를 디자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항상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 중 하나인 것 같아서, 나를 남들이 도와주면 좋겠어요. 동시에 저 같은 기분을 느낄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참을 수 없더라고요. 나도 도움을 바라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들을 돕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취준 시절 일하던 곳에서도 사람에게 친절하고, 일을 편하고 즐겁게 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모든 사람들의 불편함을 미리 알아채고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걸 알게 되었죠. 그럼 그동안 가장 오래 했던 디자인과 어떻게 연결 지으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처음 디자이너를 하면서 실무 디자인을 학교 디자인과 다르게 고객의 니즈를 맞춰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디자인은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구나. 그러나 그 시점에서는 디자인과 제 스타일을 연결 짓기보단, 내가 하고 싶은 예쁜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직장을 원했습니다. 저를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퇴사를 하게 된 거죠. 그래서 다른 회사들의 면접을 가면서 오히려 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디자인과 저를 연결 짓게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저는 제가 잘하고 좋아하는 "도움"을 "디자인"과 연결하는 작업을 할 예정입니다. 앞으로 브런치에도 그런 고민을 하는 글이 올라오지 않을까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일일일글] 규모 앞 무력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