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차 직장인의 ‘폴레폴레’ 공부 생활
저는 ‘폴레폴레 아프리카’ 저자입니다. 2016년 특파원으로 동아프리카 8개국을 둘러보고 돌아와 그곳에서의 경험에 생각을 보태 쓴 책입니다. 책 소개를 하면 ‘폴리폴리가 무슨 뜻이야?’라는 질문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폴레폴레(Pole Pole)는 동아프리카에서 널리 쓰이는 스와힐리어 표현인데요, 천천히, 조금씩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등반을 한다면 여정을 함께하는 가이드로부터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죠. 킬리만자로는 산을 사랑하는 한국 사람들의 발길도 잦은 편이어서 종종 반가운 우리말을 들을 수 있고요, 일부 가이드는 한국인 등산객들에게 몇몇 표현을 배워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빨리빨리 노(No)!, 폴레폴레 오케이(OK)!”입니다. 킬리만자로를 수십 번도 넘게 오르고 내린 가이드는 “빨리 가려고 하면 정상까지 갈 수가 없다. 폴레폴레 가야 한다”라고 성격 급한 저를 타이르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우후루 피크’ 정상까지 올라갔느냐고요? 아니요 못 갔습니다! 그 정상 바로 직전 포인트인 길만스 포인트까지 갔는데, 너무 춥고, 정신이 없고, 더 가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동갑내기 가이드 손을 붙잡고 터덜터덜 하산했습니다. 그래도 좋더라고요, 폴레폴레를 건졌잖아요.
한국에 돌아와 폴레폴레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거의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일하랴, 시간 쪼개 책쓰랴, 취미 활동하랴, 시간을 쪼개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바빴죠. (아 물론 이렇게 쓰면 엄청 부지런한 것 같지만, 잠옷 채로 침대에 누워 멍 때리며 하루를 보낸 날도 많았습니다. 특히 주말에) 게다가 갑자기 영국 석사 유학까지 준비하게 됐으니, 폴레폴레는 엄두도 못 냈죠.
갑자기라고는 했지만 사실 영국에서 석사 공부를 하는 것은 제 오랜 꿈이었습니다. 일단, 해리와 함께 유소년 시절을 보낸 저는 대학 시절 해리포터 영화 마지막 편을 보고 돌아와 결심했습니다. ‘나중에 꼭 영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야지!’ 실용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일단 영어로 공부를 할 수 있고, 영국은 석사 프로그램이 대부분 1년 과정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합니다.(학부는 보통 3년이고요, 그래서 학부를 마치고 곧바로 석사를 하는 친구들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는데, ‘망했구나~’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이왕 이렇게 된 것 해보고 싶던 일이나 해볼까’ 하면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책을 출간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구상 - 계획 - 실천- 현실화’ 하는 과정을 몸소 체험하기도 했고요.
유학을 위한 구상과 계획을 마치고,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현실적인 고민들이 뒤따랐지만 ‘일단 합격하고 생각하지 뭐!’라고 마음을 정리했지요. 정작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지 못하면 그러한 고민 자체가 필요 없어지니까요. 어쨌거나 회사에 다니면서 꾸역꾸역 자기소개서와 학업계획서를 쓰고 영어 시험도 준비했습니다. 시간도 부족하고, 런던 내 가고 싶은 다른 학교도 없었기에 현재 다니고 있는 런던 정치 경제 대학(LSE) 단 한 곳만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반가운 합격 소식을 접했지요.
자, 이제 현실 고민 시간입니다. 회사에 1년만 휴직을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자기 계발을 위해 휴직을 할 수 있다는 사규가 있기는 하지만, ‘회사가 이를 인정할 시’라는 조건이 달려있습니다. 더구나 당시 회사에 손이 부족해 무척 바쁜 시기이기도 했고요. 아쉬웠지만 저도 막상 관두려니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게다가 저는 기자라는 업의 '본질'을 좋아하거든요. 새로운 사람/사건/업계 등등에 대해 배우고(취재하고), 독자들이 알기 쉽게 글을 써서 전달하는 일 말입니다.(그 외 스트레스 영역은 나중에 다룰 기회가 있다면 한 번...) 어쨌거나 고민을 하다가 학교에 입학 유예 신청을 했습니다. 다행히 1년까지는 유예를 받아주는 제도가 있어서 제 입학은 2019년 9월로 미뤄졌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벌써 5개월이 흘렀네요.
1년 과정은 총 3학기로 이뤄져 있는데, 첫 두 학기에만 수업이 있고 이 마저 각각 12주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학기는 졸업 논문을 쓰는 기간으로 사실상 수업이 거의 없어요. 각 학기 사이에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방학이 있습니다만, 직장인에게 출근이 있다면 학생에게는 숙제가 있지요. 덕분에 학기 중은 물론 방학에도 정신이 없습니다. 영어로 사회과학 계열의 학문을 공부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게다가 학부도 아닌 석사 과정으로 말이죠. 더구나 제가 공부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언어가 참 중요한 학문이니까요. 제가 친구들에게 농반 진반으로 하는 말이 “커뮤니케이션 공부하러 왔는데, 커뮤니케이션이 안 돼!”인데, 친구들은 제 속도 모르고 깔깔댑니다. 물론 제 영어 실력이 아주 형편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면 입학도 못했겠지요. 그렇지만 영어로 하버마스의 ‘공론장’ 그람시의 ‘헤게모니’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탈식민주의 이론의 ‘타자화’ ‘하위주체’ 등등 추상적인 개념을 공부하려다 보니 벽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친구들이 (과장을 조금 보태) 후루룩 읽을 논문을, 저는 한 자 한 자 뜻을 음미하며(라고 쓰고 사전을 찾아가며 라고 읽어야... 일부러 긍정적인 단어를 골라봤습니다! 나는 음미하는 것이다!) 몇 시간 읽습니다. 쓰기는 또 어떨까요. 제가 하는 과정은 대부분 에세이로 평가를 하는데요, 다른 친구들이 하루 이틀에 끝낼만한 과제라면 저는 일주일, 친구들이 일주일이 필요하다면 저는 3~4주가 필요합니다.
그래도 참 감사합니다. 공부 덕분에 제게 부족했던 ‘끈기’를 배우고 실천하는 느낌입니다. 저는 뭐든지 잘 시작하고, 재미난 일 벌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요, 생각해보니 끈기 그리고 그 끈기를 요하는 꾸준함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더라고요. 성인이 되고 학교/직장 생활을 제외하면 몇 년 동안 꾸준히 한 일이 거의 없더군요. 그나마 요가를 5년 이상 했고, 지금 이곳에서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끈기를 발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의욕만 불타서 빨리 성과가 나지 않으면 답답해했던 것 같고요. 그러다 보니 꾸준함에서 나오는 내공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게 바로 인생인데 말이죠. 꾸준함, 끈기를 가지고 그냥 하는 것, 지루함과 답답함을 견디며 오늘도 나아가는 것 말입니다. 당장 눈에 성과가 보이지 않는 공부를 꾸역꾸역 하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런던에서 무엇을 배우느냐고 물으신다면,
꾸준히 인생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씀드리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