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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진 Aug 28. 2020

내 작은 세계는 확장 중Ⅰ

피케티를 만나다

세계 주요 도시에서 공부하는 장점 중 하나는 각 분야 전문가, 특히 학계 전문가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다는 거다. 자연히 그 전문가들을 강연이나 콘퍼런스에서 만날 가능성도 커진다. 내가 다닌 런던정경대(LSE)에서도 여러 전문가를 모시는 대중 강연이 빈번히 열렸다. 하지만 학생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공개된 행사여서 특별히 유명한 인사가 연사로 오는 강연은 티켓 구하기가 많지 않았다. 티켓 오픈날 표를 나눠주는 학내 기념품 샵에 길게 줄이 늘어서고 이 마저 거의 5분 이내 마감된다. 온라인 추첨에 도전해 볼 수 있지만 역시나 당첨은 쉽지 않다. (참고로 난 단 한 번도 당첨돼 본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강연 당일 현장에서 기다리다가 취소 표를 노려볼 수도 있는데 이 역시 'first come, first serve(선착순!)'이어서, 막상 가보면 장사진을 이룬다.


온라인 당첨 운이 없던 나 역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강연 당일 현장에 가 본 적이 있다. 노벨 경제학상 스티글리츠가 왔을 때다. '스티글리츠! 책에서 본 그 이름! 대학 수업에서 들었던 그 이름! 엄훠 이건 가야 해!!!'. 한국에서 온라인 수강 신청으로 단련된 클릭질도 소용이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혹시나 하며 강연장에 가봤지만, 역시나 줄은 길었다. 자리가 남으면 들어갈 수 있는 대기표는 이미 두 자릿수를 넘겼다. 조금 기다리다가 대기표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렇게 한 학기가 흘렀는데, 어느 날 '21세기 자본'으로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떨친 피케티가 강연을 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피케티는 스물두 살에 LSE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고 강단에 서기도 했는데,  신간 '자본과 이데올로기' 영문판 출간을 앞두고 처음으로 대중을 만나는 자리였다. 비록 호킹 지수(책을 구입한 독자가 실제로 읽었는지를 따져보는 지수) 최강일 것 같은 21세기 자본을 구입하지도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호기심이 동했다. 세계적인 학자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을 계기로 그의 책도 읽어봐야겠다는 마음도 동했다. 나 역시 세상이 왜 이렇게 불평등할까, 종종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이기에.


이미 여러 학생들이 피케티 강연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당연히 오프라인 표는 눈 깜짝할 새 매진, 온라인 당첨은 이번에도 물 건너갔다. 아쉬워하던 차에 이런 대중 강연에 일정한 수의 '프레스석(언론사에 취재 목적으로 제공하는 자리)'이 마련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장 담당자에게 구구절절 메일을 보냈다. '저는 현재 우리 학교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지만, 한국 저널리스트이기도 하며... 저희 회사는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언론사로... 블라블라..' 회사 영문 홈페이지 주소도 첨부했다. 런던에 주재 중이신 특파원 선배께 강연을 들어보고, 전할만한 내용이 있으면 기사로 쓰고 싶다는 말씀도 드렸다. 담당자로부터 생각보다 금세 회신이 왔다. 프레스석을 확보해 두었으니 당일 강연장으로 와서 이름을 말하면 안내해 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유레카!!!


당일 역시나 400여 석 대형 강의실은 청중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프레스석은 1층 맨 뒷자리에 마련돼 있었다. 옆좌석에 있던 이스라엘 기자와 인사도 나눴다. 피케티는 생각보다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 프랑스어 억양이 강한 자신의 영어 발음에 양해를 구하며 "이 말투를 바꾸기게 런던에서 살았던 기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너스레를 떨어 청중들을 웃기는가 하면, 강연 중간중간 재미있는 농반진반을 섞어 1시간 남짓한 시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이끌었다. 그중 한국이 아주 잠깐 사례로 나오기도 했다. 부의 재분배를 위해 조세 정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면서 "죽기 전에 사유 재산이 많으면 한국이나 일본 같은 자본주의 국가가 아닌 상속세가 0%인 중국으로 가서 돌아가셔야 한다"라고 농을 던진 것이다. 한국 기자인 나는 이 말을 놓치지 않고 기사에 실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00208006800085)


강연을 마치고는 구입한 도서에 직접 사인도 받았다. 한국에서 온 저널리스트라고 했더니 잠시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기도 했다. (이거슨 아이 콘택트!) 이 무겁고 두꺼운 벽돌 책을 나중에 한국까지 다시 가져갈 생각에 잠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미처 사인을 받지 못한 다른 청중들의 부러움에 근심은 일단 제쳐두기로 했다. 이제 잘 읽기만 하면 된다. 내 작은 세계의 확장을 위해. 

피케티가 직접 사인해 준 책


+ 한 줄 질척대기.

'자본과 이데올로기' 한국어판 표지의 띠지를 보면 "지금까지 내가 쓴 책 중 한 권을 읽어야 한다면, 이 책을 읽기 바란다."라는 피케티의 말이 쓰여있다. 독자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말일 것이다. 전문 연구자가 아닌 이상 피케티 저서 전체는 커녕 한 권을 완전히 독파하기도 쉽지만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내가 강연에서 듣고 기사에서 쓴 피케티의 말을 출판사가 보고 인용한 것이 아닐까, 매우 즐거운 의심이 든다. 

내가 쓴 피케티 기사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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