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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진 Aug 27. 2020

하면, 된다

살아보니 그런 것 같다

"도대체 이 유학이 가능한 건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김정운 작가는 저서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2019)'에서 독일 박사 유학 시절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눌한 독일어로 진행하던 세미나를 교수님이 삼십 분 만에 중단해버리고, 혼자 눈물을 훔치며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까먹으며 공부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삼십줄을 넘겨 영국으로 유학을 온 나는 훗날 만난 저 문장에서 한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틈틈이 준비하고, 선례가 없다는 회사를 겨우 설득, 휴직을 받아 어렵게 성사된 유학이었다. 그런데 막상 와서 공부를 하려니 그게 더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정운 작가는 그래도 어리기라도 하셨지. 힘든 마음을 나누고, 어려움을 나눌 아내라도 있었지.' 세상사 원래 내가 제일 힘든 것 같다고, 못난 생각도 해봤다. 원래 사람이 여유가 없으면 마음이 인색해 진다. 그만큼 늦깎이 유학 생활은 쉽지가 않았다.


첫 수업 준비부터 충격을 피할 길이 없었다. 영국에 오기 직전까지 출근을 하고, 일주일 휴가를 내 살던 집서 짐을 빼고, 또 짐을 싸고 하느라 공부할 준비는 거의하지 못했다. 처음 며칠 간 기숙사와 이케아, 백화점, 마트를 오가며 필요한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나니 어느새 개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더는 미룰길이 없어 짐을 챙겨 도서관으로 향했다. 영문으로 된 학교 로고가 새겨진 후드티를 입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나의 모습. 언제 시작됐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나의 오랜 로망이었는데 이제 이제 곧 실현될 참이었다.


도서관 정문을 지나 3층 창가 나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곳곳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전 세계 곳곳에서 온 젊은이들, 각양각색의 모습에서 새삼 내가 런던,  바로 그 런던(THE LONDON)에 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에 열중한 청춘은 무조건 아름답다. 이제 나도 그 중 하나다! 기세 좋게 논문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는데, 머지 않아 충격과 공포가 찾아왔다. 이거슨 당췌 무슨 말이당가. 흰 것은 종이이고, 검은 것은 글자당가. 읽고 또 읽을 수록 모르는 단어가 계속 등장했다. 마치 끝나지 않는 두더지 게임처럼, 한 놈을 사전에서 찾아 때려 잡으면 그새 또 한놈이 튀어나와 있다. 한 페이지에서 내가 모르는 단어를 다 도려내고 나면, 종이를 창문에 붙여 방충망으로 써도 될 판이었다.


논문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지식인들의 의사소통과 그 과정에서 어떻게 여론이 형성됐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당시 파리 지식인들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혹은 카페와 살롱에서 만나 사회를 논했다. 사실상 하버마스가 말한 '공론장'이라는 개념도 여기서 유래한거다. 내용도 흥미로울 뿐더러 중간중간 당시 오고 간 편지나 카페, 살롱을 중심으로 유통된 인쇄물(지라시의 원조?) 삽화도 포함돼 읽는 재미가 있는 논문이었음이 분명하건만, 읽는 동안에는 참으로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결국 달팽이 속도로 40여페이지를 읽고 나니, 어느새 밖이 어둑어둑해졌다. 심지어 다 읽지도 못했다(참고 문헌 제외 50여 페이지짜리 였다). 그리고 아직도 읽어야할 필수 읽기 자료가 쌓여있다. 허허허. 실제 수업에 가면 얼마나 더 충격을 받을까? 허허허.


그래도, 좋다. 어쨌든 그토록 바라던 일을 실제로 '하고 있으니' 있으니 말이다. 삶을 논하기엔 아직도 쪼랩인 나이지만, 그래도 살아보니까 '하면, 된다'는 말이 맞다는 걸 깨달았다. 이 유학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하면 된다'가 안되는 것도 일단 밀어부치면 어떻게든 된다는, 무식한 조폭식 구호로만 보였는데, 돌이켜보니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료한 삶의 명제였다. 그야 말로 '하면' → (무엇이든) '된다' 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즉, 안하면 결과가 무엇이든 안되지만, 일단 하면, 어떻게든, 무엇이든 되긴 된다. 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한다'는 힘이 가해지면 '된다'는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만 한다와 된다 사이에는 여러 변수와 상수가 있는 만큼, 뭐가 될지는 모른다. 그래도 일단 뭔가가 되고 싶으면 해야하고, 그게 잘되길 바라면, '잘'과 정비례하는 '노력'이라는 상수를 키울 수 밖에. 정해진 시간도 현명하게 쓰고 말이다. 1년간의 나의 유학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하기 시작했으니 일단, 잘되도록 노력해야지. 날라리를 꿈꾸는 이 범생이는 오늘도 이렇게 교훈과 다짐으로 진부하게 글을 마무리한다. 어쨌든 하면, 된다. 

도서관에서 공부 중인 늦깎이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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