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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진 Jun 08. 2020

인종차별은 있다

#against racism #blacklivesmatter

살면서 처음으로 제 자신을 '인종'으로 자각한 건 대학생 때 호주로 어학연수 겸 워킹홀리데이를 떠났을 때였습니다. '아, 내가 아시아인이구나'라고 새삼 깨닫게 된 거죠. 그전까지는 한국을 벗어나 본 적이 없으니 '한국 사람', 그러니까 국적이 저를 규정하는 범주 중 제가 인식할 수 있는 가장 넓은 개념이었습니다. 이 마저도 월드컵이나 올림픽이 열릴 때나 잠깐 느끼는 정도였을 뿐이죠. 어쨌거나 해외에서, 특히 서구 국가에서 저는 한 개인으로 인식되기 전에는 아시아인이었습니다. 제 외모가 명백히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호주에서 반년 남짓 머무는 동안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적은 없습니다. 아, 무더웠던 어느 날 병맥주를 쭉쭉 들이키며 시드니 하버브리지를 걷는데 행인들이 저를 쳐다보길래 '아시아 여성이 대낮 길거리에서 술을 마시며 걸으니 쳐다보는 건가?'하고 내심 불쾌했는데, 알고 보니 호주에서는 외부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될뿐더러 술을 사서 이동할 때도 밖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갈색 봉투에 싸서 지녀야 한다더군요. 


그렇다면 런던에서는 어떨까요? 다행히도 지난 9개월 간 인종차별 때문에 불쾌함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분명 제가 운이 좋았을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한 유학생은 버스에서 한 백인 여성에게 초코볼 세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가해자는 10대로 추정되는데 몇 차례나 초코볼을 던져서 머리를 맞췄다고 하더군요. 이 유학생은 가해자를 휴대전화로 촬영했는데, 가해자 친구가 휴대전화를 빼앗으려고 해서 말싸움까지 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 사건은 코로나 사태 이전에 벌어진 일입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에는 더 많은 에피소드를 전해 들었죠. 버스에서 한국인(가해자 눈에는 그저 동아시아인으로 보였겠죠)을 가리키며 '코로나'라고 부른다든지,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든지 하는 속상한 이야기들이요. 한 유학생은 집 앞에서 백인 할아버지가 팔꿈치로 세게 밀쳐서 거의 넘어질 뻔했다고 하더군요. 참 저도 에피소드가 하나 있네요. 얼마 전 플랏 메이트들과 차이나타운에 갔다가, 거기 상주하는 노숙인이 멀찍이 떨어져 있던 저희를 바라보며 '차이나' '코로나'라고 소리 지르는 걸 들었습니다. 순간 기분은 나빴지만, 굳이 똥이 있는 곳까지 가서 일부러 밟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냥 무시했습니다. (참고로 이 노숙인은 원래부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큰 소리를 내 깜짝 놀라게 하는 게 취미이니 혹시 나중에 이곳에 가실 일이 있으면 기억해 두세요.)      


코로나 사태 이후 동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이 수면 위로 떠올랐는데, 서구 사회에서 가장 뿌리 깊고 역사가 오랜 인종차별은 흑인에 대한 차별이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와 착취하던 식민지 시대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까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구조적인 차별이 직간접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나 영국에서나 사회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에 흑인 인구 비중이 크지요. 이런 경향은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도 잘 드러났지요.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흑인 가구에서 사망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사회 경제적 취약 계층인 데다가, 이로 인해 건강을 잘 돌보지 못해 기저질환이 있는 경우도 많았고요. FT 기사를 보니 미국에서 경찰 공권력으로 인한 피해자 비중도 흑인이 월등히 높았습니다. 물론 흑인 사회에서도 교육, 경제 수준은 천차만별이지만 여러 통계와 직간접 경험에 비춰 마이너리티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흑인 사회의 울분과 설움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저희 학과의 한 영국인 교수님께서 해리 왕자 왕세손비인 메건 마클이 영국을 떠난 이유가 인종 차별 때문이라고 개탄하셨던 기억도 납니다.


어쨌거나 8분 46초 동안 백인 경찰의 무릎에 목이 짓눌려 숨진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이야기는 흑인 사회의 울분과 설움을 거대한 분노로 바꾸기에 충분했지요. 저도 영상을 찾아봤는데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두 경찰의 몸에 깔린 채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조지 플로이드의 모습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 있나'. 영상에서 음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조지 플로이드가 숨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 역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숨을 쉴 수가 없어요(I can't breathe)'. 그토록 자유를 중시한다고 강조하더니, 정말인지 소수자들은 숨 조차 쉴 수 없는 사회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비난의 화살은 가해자인 백인 경찰 데렉 쇼빈(Derek Chauvin)에게로 가장 먼저 쏠렸지만, 분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앞서 말했든 소수자 특히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오랜 구조적 문제이니까요. 더구나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뒤 인종차별을 조장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거나, 이민자를 차별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죠. 이를테면, 아프리카 국가들을 '똥통(shit hole)'이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이민자 자녀들을 하루 아침에 불법체류자로 만들어버리거나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는 등등이요. 2017년에는 경찰들 앞에서 한 연설에서 '너무 잘 대해주지 마(Don't be too nice)'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BBC: https://www.bbc.co.uk/news/av/world-us-canada-40758498/trump-to-police-don-t-be-too-nice)


저 역시 분노의 목소리를 보태고 싶어서 'Black lives matter'시위에 동참했습니다. 런던에서는 최근 며칠 새 하이드파크, 의회 광장 등에서 연달아 열렸고 오늘은 미 대사관 앞에서 진행됐습니다. 시위는 생각보다 차분했습니다.  대부분 특정 단체나 집단 구성원이 아닌 개개인으로 참여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종이 골판지 따위로 만든 손팻말들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흑인의 삶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부터 '코로나는 안 무섭지만 당신들의 인종차별은 무섭다 (Corona is not scary but your racism does)' '흑인의 역사를 가르쳐라(Teach Black History)' '우리는 숨을 쉴 수 없다(We can't breathe)' 등 공감 가는 구호가 많았습니다. 저도 영어와 한글로 적힌 손팻말을 만들어갔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구호를 따라 외치고, 박수도 치며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세상을 등진 조지 플로이드가 평온히 영면하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인종차별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런던 미 대사관 앞에서 열린 'Black Lives Matter'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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