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과 펜타닐 중독 문제에 관하여
"Welcome to high life(황홀한 삶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맨해튼 거리의 한 대마초 판매점 앞에 쓰인 문구다. 뉴욕주는 2021년 3월 기호용 대마초를 합법화했고, 시내 곳곳에 공인 판매점이 있다. high라는 영어 단어에는 '(술이나 마약에) 취한'이라는 뜻이 있다. 하지만 화창한 5월의 뉴욕 거리를 걷다 보면 마약 따위 없이도 마음이 한껏 달뜬다. 높고 파란 하늘, 적당한 기온, 부드러운 바람. 센트럴파크에 들어서면 흥분이 더 고조된다. 초록색 잔디의 싱그러움이 땅을 디딘 발을 타고 온몸에 퍼지는 것만 같다. 행복한 표정을 보니 공원 안의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인 듯하다. 햇살에 몸을 맡긴 여인, 피크닉을 즐기는 가족, 손을 잡고 걷는 연인, 야외에서 동작을 가다듬는 댄서. 공원 곳곳 운동장에는 청소년 야구단의 경기가 한창이다. 그야말로 미국의 건강한 풍경을 한 데 모아 놓은 것만 같다.
어느 사회에나 이런 모습만 있다면 좋겠지만, 빛과 함께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뉴욕에서는 그 그림자가 냄새로 먼저 감지되는 것 같다. 담배와 대마초 냄새, 그리고 찌린내. 스트레스를 태워버리려는 듯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이제는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대마초를 손에 든 사람도 많다. 여기에 거주 인구만큼이나 많은 반려견들이 지린 오줌과 블록마다 있는 노숙인들이 풍기는 쩐내가 도심 공기를 메운다. 뉴욕에 노숙인이 그렇게 많냐고? 그렇다. 지역마다 조금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맨해튼에서는 집 밖으로 나간 이상 노숙인을 마주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어제 집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베슬(The Vessel)까지 걸어가는 동안 거리에 늘어져 있는 노숙인 두 명을 봤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경찰서가 있고 렌트비가 꽤나 높은 아파트가 밀집한 지역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위험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을 주저할 것이다. 거리의 노숙인을 볼 때마다 여전히 놀라긴 하지만 위협을 느낀 적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아직까지는 뉴욕의 노숙인 중 '좀비 마약'이라 불리는 펜타닐 중독자 비율이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덕분으로 보인다. 체감상 그렇다. 뉴욕에서 2주 간 지내며 펜타닐 중독으로 보이는 노숙인은 거의 보지 못했다. 펜타닐 중독자는 부작용으로 근육이 경직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좀비처럼 걷는다. 앞서 내가 '거의'라고 한 이유는 엊그제 42번가 Port Authority 버스터미널에서 펜타닐 중독으로 의심되는 노숙인을 보았기 때문이다. 반백의 흑인 남성이 허리를 굽힌 채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순간 깜짝 놀랐지만 워낙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거리였고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경찰관 두 명이 시야에 들어왔기에 마음은 금방 진정됐다. 뉴욕의 청량리역과 같은 Penn Station 주변 등 다른 지역에는 이러한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뉴욕에는 좀비 노숙인이 밀집해 통행을 못하거나 안전에 위협을 느껴야 하는 곳은 없는 것 같다.
현지 뉴스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다른 대도시는 상황이 다른 듯하다. 서부 샌프란시스코가 대표적이다. 이곳에서는 최근 대탈출(Exodus)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운을 뗀 것은 미국의 고급 슈퍼마켓 체인 홀푸드마켓(Whole Foods Market)이다. 홀푸드는 2022년 3월 샌프란시스코의 마켓 스트리트에 64737 제곱피트, 그러니까 1천819평 규모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야심 차게 개장했지만, 13개월 만인 지난 4월 폐점을 선언했다. 사유는? 놀랍게도 직원 안전 문제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이 지점이 1년 남짓 영업하는 동안 568차례 911에 신고를 했다. 1달에 약 44 차례, 그러니까 하루에 한 번 이상 신고한 셈인데, 폭력이나 부랑자, 약물 등의 문제였다. 주변 노숙인들이 매장에 들어와 똥을 싸려고 한다거나, 마체테와 같은 흉기를 들고 와 직원을 위협했다는 것이다. 화장실에서는 펜타닐과 메스암패타민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이 발견되기도 했다.
트위터에서 관련 영상을 검색해 보니 홀푸드 바로 인근에 노숙인촌이 형성돼 있고 그곳에서 마약 거래, 심지어 투약까지도 이뤄지는 듯했다. 마트 지하주차장에서 눈앞에서 차량을 털어가는 2인조 도둑의 모습이 포착됐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우범지대로 분류되는 텐더로인(Tenderloin) 지역에 산다는 한 청년은 그곳에 거주하는 것이 너무나 위험하게 느껴져 이사를 가고 싶지만 돈이 부족하다며 자신을 도와달라는 글을 한 펀딩사이트에 올리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른 유통기업도 홀푸드와 같은 결정을 내리는 모양새다. 고급백화점 체인인 노드스트롬(Nordstrom)이 샌프란시스코 내에서 2개 지점을 폐쇄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샌프란시스코 엑소더스 행렬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트위터, 세일즈포스 등 거대 IT 기업 본사가 밀집해 한 때 미국 혁신의 중심지로 불렸던 샌프란시스코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늘 그렇듯 문제는 경제와 정치다. NYT는 코로나로 인한 경기 침체를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고임금을 받으며 생활하던 샌프란시스코 직장인들이 코로나와 재택근무로 지갑을 닫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는 출근할 필요가 없어지자 아예 비싼 이 도시를 떠나 다른 곳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 지역 자영업자들이 하나 둘 무너지고, 상권이 죽고, 경제가 망가졌다는 거다. 벼랑에 몰린 사람들이 노숙인이 되고,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하는 악순환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UC버클리의 정부학 연구소가 북미 9개 주요 도시 중심부의 통화량을 토대로 경제 회복 수준을 분석한 보고서를 보면, 샌프란시스코의 회복 속도가 가장 뒤처진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문제에 적극 대처했어야 할 리더십 부재를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현재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민주당 소속 런던 브리드(London Breed)다. 샌프란시스코는 1964년 이후 단 한 번도 공화당에 시장 자리를 내어준 적이 없다. 한마디로 민주당 텃밭인 셈인데, 관련 기사나 트위터에서 여론을 살펴보면 '민주당이 계속해 먹더니 꼴좋다'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많다. 당장 트위터에서 런던 브리드를 검색해 보면 이러한 취지의 글을 끊임없이 볼 수 있다.
이중 눈에 띄는 글이 하나 있었다. 아마도 뉴욕 거주자로 짐작되는 누군가가 샌프란시스코 노숙인들을 촬영한 영상에 "여기에 비하면 뉴욕은 천국"이라는 댓글을 남겼다. 뉴욕생활자로서 실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안타까웠다. 한국에서 일본까지의 거리보다 먼 곳에 있는 도시지만, 어쨌거나 당분간 미국이라는 나라에 살게 된 사람으로서 어느 도시든 부정적인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쓰인다. 어디를 가든 지난 주말 센트럴파크에서 마주한 건강한 풍경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길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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