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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뉴욕 생활의 시작과 끝, 뉴욕공립도서관

by 김수진

뉴욕 생활 초반 출근할 회사도, 수업 들을 학교도 없었던 나는 거의 매일 도서관에 갔다. 직장에서 하던 대로 조간을, 그러니까 도서관에 비치된 뉴욕타임스나 파이낸셜타임스를 읽고 나면 백수의 하루 시작도 괜히 뿌듯했다.


맨해튼에는 곳곳에 뉴욕공립도서관(NYPL)이 있다. 맨해튼, 브롱스, 스태튼 아일랜드에 92개 지점이 있다 하니 내 말이 과장은 아니다. (브루클린과 퀸즈는 borough 자체 도서관 시스템이 있다.) 가장 먼저 발을 들인 곳은 53번가 도서관이다. MoMA 건너편을 지나가는데 유리문 너머 한국어 책을 전시해 놓은 것을 보고 홀리듯 이끌렸다. 알고 보니 한국인 사서가 있는 도서관이었다. 멤버십 가입도 이곳에서 했다. 원래는 뉴욕시에 산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신분증이나 내 이름이 적힌 우편물을 가져가야 하는데 피노키오 할아버지처럼 안경을 코끝에 걸친 인자한 표정의 사서 할아버지는 내게 아무런 서류도 요구하지 않은 채 가입을 도와주시며 “환영한다”라고 했다. NYPL 상징인 사자가 그려진 빨간 카드와 스파이더맨 카드 중 디자인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망설이다가 스파이더맨을 택했다. 뉴욕에서는 나도 슈퍼히어로 비슷한 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 같다.


가장 유명한 지점은 브라이언트 파크 옆 클래식한 건물의 플래그십 NYPL이다. ‘용기’와 ‘인내’라는 별명의 두 사자 석상이 늠름히 지키고 있는 석조 건물 앞에는 매일 이른 아침부터 긴 줄이 늘어서있다. 부지런한 관광객들이다. 1911년에 지어진 역사적인 건물로 외관과 내관 모두 고풍스럽다. 상설 전시관과 기념품 판매샵도 있어서 관광객이 몰리는 게 당연하다. 나도 지인들이 놀러 오면 이 기념품 샵에서 NYC 수첩, 엽서 따위를 사서 선물하곤 했다. 하지만 건물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은 리딩룸이다. 내 키의 열 배는 될 것 같은 높은 천장 아래 커다란 아치형 창으로 빛이 들어 웅장하면서도 아늑하다. 책상마다 스탠드도 있다. 사진으로 만 본 영국 옥스퍼드나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 못지않다.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님도 종종 이곳에서 글을 썼다지. 나 역시 이곳에서 종종 무언가를 쓰거나 필요한 작업을 했다. 하지만 들고 날 때 매번 책가방 검사를 해야 하고, 경비원에게 ‘연구나 공부를 하러 왔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왠지 번거로워 아주 자주 찾게 되지는 않았다.


뻔질나게 드나든 곳은 길 건너 Stavros Niarchos Foudation Library다. 지하부터 루프탑까지 8층 건물로 NYPL 중 규모가 가장 크고, 그만큼 책과 프로그램이 많다. 심지어 ’ 연봉’이 웬만한 대리급이라 ‘블대리’라는 별명이 있는 블룸버그 투자 정보 터미널 기기도 세 대나 있다. 누구나 쓸 수 있는데 항상 누군가가 이용하고 있어서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맞나 싶기는 했다. 나는 주로 서가를 어슬렁 거리다 식수대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게시판을 훑어보곤 했다. 그러다 재미있어 보이는 수업이나 프로그램이 있으면 날짜를 기억해 뒀다가 참석했다.


정기적으로 나갔던 프로그램은 ‘Enlgish Conversation Hour’. 사실은 I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E형 인간은 사람과 수다에 목이 말랐고, 이 프로그램은 내게 뉴욕의 오아시스가 되어줬다. 봉사자로 나선 뉴요커가 대여섯 명으로 구성된 그룹의 대화를 이끌었는데,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했다. 팔로어가 수십만 인 러시아 인플루언서, 미국 정착을 꿈꾸며 박사 과정을 다시 시작하려는 아르헨티나 심리학자, 베네수엘라 셰프, 나처럼 주재원 가족으로 뉴욕에 온 스페인 주부(남성이다!), 인생 2막을 열고자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뉴욕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는 튀르키예인, 도쿄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미국인 남편과 이주한 일본 간호사. 매일매일 이렇게 다양한 배경의 사람을 한 번에 만난 적도 처음이었다. 이중 몇몇과는 커피 한 잔 하고, 밥도 먹고, 술잔도 기울이다 결국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나누는 친구가 됐다. 이들이 나의 뉴욕 생활을 메마르지 않게 했다.


사랑하니 말이 길어진다. 콩깍지 때문인지 자랑하고 싶은 게 많다. 하고 싶은 말은 도서관이 내 뉴욕 생활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것. 아기를 낳고도 가장 자주 가는 곳이 도서관이다. 1층 로비를 어슬렁대다 보면 특정 시간에 경비원의 호위를 받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아동 청소년 섹션으로 우루루 몰려가는 유아차 부대 항상 인상적이었다. 이제 내가 그중 하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있는 ‘주차장’에 유아차를 ‘주차’해 놓고 아기와 서가로 향한다. 아기,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책이 책장 가득 쌓여있고, 매주 사서가 진행하는 스토리타임도 있다. 심지어 여름에는 아이들을 위한 콘서트도 열린다.(뉴욕공립도서관 만세!!!) 밤무대에서 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연주할 것만 같은 프로 뮤지션들이 기타를 치고, 타악기 카혼을 두드리며 동요 메들리를 불러준다. 가끔은 자신을 위한 것인지 부모님(혹은 내니들)을 위한 서비스인지 팝을 불러줄 때도 있다. 이를테면 제이슨 므라즈 같은. 그러면 나도 락페라도 온 듯 떼창에 합류한다. (아, 미국이니까 싱어롱이라 해야 하나?)


아기와(?) 신나게(??) 놀고 난 뒤에는 책을 한 움큼 빌린다. 내용을 깊이 살펴보지 않고 아기가 손을 베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종이로 엮인 동화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온다. 분명 닥치는 대로 집은 책들인데 등장하는 캐릭터가 한결같이 다양하다. 아시아인, 흑인, 백인 등등 여러 인종(과 동물이)이 어울려 노는 모습은 당연한 거고, 휠체어를 탄 아이, (설명은 없지만 아마도 화상 때문에) 얼굴 피부가 얼룩덜룩한 아이도 주인공이다. 한 번은 고아원의 아이가 위탁 가족을 찾는 내용의 동화책이었는데, 위탁 후보 가정 부모님이 각각 여성, 남성 동성 커플인 동화책도 있었다. 뉴욕에 살면서 이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다양성이란 것을, 다른 사람과 어우러져 사는 법을 배우겠구나 싶었는데 이 도시는 늘 내 생각을 뛰어넘는다.


한 번은 사서들이 테이프로 페이지마다 점자를 붙여놓은 책을 빌리게 됐다. 스토리타임 ‘연사’로 종종 나서는 사서 레이철에게 ‘일일이 작업한 것이냐’고 물으니 “그렇다”면서, “여력이 안 돼 모든 책에 붙이지는 못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난 역시 뉴욕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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