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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혁수 Jun 16. 2016

몰카 없어도 훔쳐볼 수 있는 세상

친구보단 알 수도 있는 사람으로 머무는 게 더 편한 이유

유능한 사냥꾼 악타이온은 개울가에서 몸을 씻던 여신 아르테미스를 훔쳐본 죄로 사슴으로 변한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는 자신을 충실히 따르던 사냥개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훔쳐보기의 대가로는 너무도 가혹하다. 혼례 첫날밤을 훔쳐보려 문풍지에 구멍을 뚫던 우리 선조들이 마주한 신부가 아르테미스가 아니란 사실이 천만다행인 것만 같다. 이처럼 오랜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관음의 욕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존재가 발각될까 숨죽이며 긴장하는 나와 달리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는데서 오는 묘한 쾌감은 우리의 본성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등장한 매스미디어는 관음의 욕구를 조금 다르게 발전시켰다. 위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CCTV 구도를 기본으로 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네덜란드에서 방영된 리얼리티 프로그램 ‘빅브라더(Big Brother)’를 시작으로 ‘치터스(Cheaters)’, ‘연애불변의 법칙’ 등이 흥행에 성공했다. 사람들은 TV에서 보리라 생각지 못했던 말초적 자극에 반응했다. 해당 포맷이 익숙해지자 미디어는 카메라의 구도를 낮췄다. 카메라의 존재가 노출되어도 출연진들은 어색해하지 않았다. ‘리얼리티’에 익숙해진 이들은 시청자의 입맛에 맞추는 방법을 알았다.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이의 부모는 가장 사적인 공간이어야 하는 집 안 깊숙이 들어온 카메라를 무시한 채 행동했다.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아이들은 카메라가 뭔지도 몰랐다. 며칠만 지나면 카메라맨을 ‘엉클’이라 부르며 따르는게 아이들이었다. 시청자들의 시선을 끄는 3B(Beauty·Baby·Beast)를 적절히 활용한 것도 하나의 요인으로 기능했다. 그렇게 ‘훔쳐보기’에 내재된 섹슈얼리티(Sexuality)가 지워지자 관음은 점점 더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었다.


트루먼쇼의 시청자와 우리는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트루먼쇼>


인터넷은 어떨까. 관음의 욕구 충족을 위해선 인터넷만한 공간이 없다. 사람들은 상대와 분리되어 있음에도 마음껏 그들의 온라인 공간을 드나들 수 있었다.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은 이들은 익명성을 유용하게 이용했다. 현실에서 상대방을 알기 위해 들여야 했던 물리적 시간도 필요 없었다. 얼굴만 알던 사람, 친구의 친구, 루머의 주인공 등이 관음의 대상이 됐다. SNS가 확대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물론 대상자는 그들을 알 수 없었다. 내 SNS의 방문자 수가 몇인지 확인하는 것으로 어렴풋이 그들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관음으로 점철된 세상에 산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채 배시시- 웃는 아이와 함께 웃음 짓고, 알 수도 있는 사람의 페이스북 속 일상을 엿보며, 궁금한 이의 학교와 이름을 구글링 한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도 ‘내가 누군갈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누구도 죄를 묻지 않는 ‘합법적 관음’이니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미디어가 관음을 대중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고 해서 그 의도에 매몰될 수는 없는 법이다. 관음은 필연적으로 내 존재를 배제하고 관계 속에 상대방만 있게 한다. 미디어에 의해 허락되는 관음이 날 지배하게 둘 수는 없다. 끊임없이 내 존재를 노출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범죄자도 아닌데 단지 편하다는 이유로 날 숨길 필요는 없지 않나. 상대와 내가 존재할 때만이 소통이 이뤄진다. ‘나’ 없는 일방적 관계는 스스로를 점점 더 음침한 곳으로 이끌 따름이다. 사슴이 될 위기를 피했다고 안심해서는 안된다. 한숨 돌리는 순간 더 무서운 형벌이 날 덮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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