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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혁수 Feb 03. 2016

그 터미네이터가 아닐 텐데?

'인지적 구두쇠'로 훑어본 미디어와 정치

사투 끝에 T-1000을 제거한 터미네이터는 자신의 부품이 사이버다인 사(社)에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 용광로에 빠진다. 헤어짐에 눈물 흘리는 존 코너에게 슬픈 한마디를 남긴 채.


너무도 유명한 터미네이터 2의 마지막 장면이다. 안 본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든 터라 각종 예능 프로그램의 스피드 퀴즈에도 자주 등장하는 영화다. 사람들은 터미네이터를 흉내 낼 때 언제나 진지한 표정으로 “I’ll be back”을 말하며 엄지를 치켜든다. 하지만 실제 영화는 다르다. 터미네이터는 용광로에 빠지는 체인을 잡으며 "I'll be back"이 아니라 “Good bye”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왜 착각을 하고 있을까. 


사물이나 현상을 인지하는 과정이 생각처럼 촘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는 마치 자린고비처럼 인색하다. 객관적 사실을 숙지한 후 판단하기 보다는 인상이나 이미지 등을 선택 기준으로 삼는다. 이를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라 한다. 단편적 정보의 조합이 완성된 정보가 되는 것이다. 많은 이가 오해하는 터미네이터 2의 마지막 장면도 모자란 인지가 자리 잡은 결과다. 인상 깊은 장면과 대사가 합쳐져 기억을 구성했고, 그것이 미디어에 의해 퍼지며 '진실'이 되었다.


인지적 구두쇠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분야는 또 있다. 바로 선거다. 일부 유권자에게선 합리적 투표가 이뤄지고 있으나 여전히 대부분의 투표행태는 권위 지향과 집단 동조의 성격을 띤다.  한국의 투표는 여태 '인물 중심'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책이나 메니페스토 따위의 것들은 뒷전이다. 사람들은 '얼굴이 훤하다'는 이유로 시장 후보에게 투표하고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로 박근혜를 비난했다. 


지역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꼼꼼히 정강정책을  살피기보다는 부산 출신이라 표를 줬다. 유능한 정치인도 전라도 사람인 게 밝혀지면 지지세력을 잃었다. 정치에 있어 이미지의 중요성을 배제할 수 없다만 유독 우리나라의 그것은 심했다. 그 덕에 집단의 이익을 대표해야 할 정당이 이합집산처럼 운영되어도 정치인은 대중에게서 요동치지 않는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인물이 곧 지지정당이었기 때문이다.


The Kennedy-Nixon debate, 1960


이미지의 중요성을 말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사례가 있다. 美대선 TV토론이다. 1960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 민주당의 케네디와 공화당의 닉슨은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누가 이길지 모르는 터라 사람들은 후보들의 소식이 나올 때마다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들의 표심을 모으는 분수령은 토론회였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유권자들은 대선후보의 토론회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토론에서의 말하기 능력이 곧 지도력과 연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960년 선거에서는 처음으로 TV토론이 도입되어 모두의 관심은 한껏 TV에 쏠려있었다. 


이전까지의 토론회를 살펴보면 강세를 보였던 이는 닉슨이었다. 라디오로 진행된 토론에서 그는 훌륭한 언변으로 지지자를 모았다. 라디오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TV토론에 출연한 닉슨은 화장도 거부하고 오롯이 토론에만 온 힘을 쏟을 태세를 보였다. 그러나 판세는 생각과 달랐다. 사람들은 반듯하고 신사적인 케네디의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 연신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훔치는 닉슨의 행동도 케네디의 우세에  한몫을 했다. 그 해 대통령 자리는 케네디의 차지였다.


정치에 있어 매스미디어가 중요해진 건 그때부터다. 효율성 측면에서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몸으로 뛰는 선거운동을 담당하던 지구당은 점점 작아지고 중앙당이 커졌다. 정당은 TV를 통한 정치공세에 열을 올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의 미디어 활용은 점점 더 늘어났다. 그렇게 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TV는 물론, 스마트폰으로도 정치를 소비한다. 대중친화를 목적으로 미디어를 이용하던 정치인들은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점점 더 미디어 속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정작 미디어 노출 횟수와 정치의 질은 비례하지 않았다. 정치를 보는 눈이 높아진 것도 아니다. 대중이 정치와 정당을 욕하기가 더 쉬워졌을 뿐이다. 10분 분량의 연설에서 하나의 발언을 따와 헤드라인으로 삼은 자극적인 인터넷 기사가 이를 도왔고 맥락 없이 클릭되는 카드 뉴스가 불을 붙였다. 진입장벽이 높은 경제, 국방을 제외한 정치 이슈는 곧 가십이 되었다.


터미네이터를 본 우리를 인지적 구두쇠로 만들었던 건 정보의 취사선택이다. 영화는 시답잖은 기억의 왜곡에 그쳤지만 정치에 있어서 인지는 그 무게가 다르다. 더군다나 매일 마주하는 미디어 속 정치는 그 '구두쇠질'을 더 쉽게 한다. 정치 이슈는 인스타그램의 음식 사진이나 페이스북의 웹툰처럼 금세 휘발되지 않는다. 정책으로 발현되어 삶을 바꾼다. 삶과 정치를 가까이 둬야 한다지만 정치 자체를 유머의 범주에 두는 지금의 세태는 고깝기만 하다. 21세기의 정치가 콘텐츠라면 우리는 '똑똑한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꼼꼼히 살피고 제대로 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7포 세대는 곧 9포 세대가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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