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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원 Oct 25. 2021

지금의 시대정신은 '생존'이다

시대정신이 중요하게 떠 오르고 있는 시점이다. 그렇다면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시대정신은 특정한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삶에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과 지금은 아니어도 미래에는 나타나길 바라는 모습이 시대정신이라고   있다. 따라서 시대정신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바로 '생존'이다. 사실 생존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예전에도 있어왔고 지금도 존재한다. 집값이 너무 올라 집을 못 사게 되는 상황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내일 잘 곳을 걱정하는 이들, 높은 소득이 예정되어 있는 전문직이 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최저임금이라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까지 '생존'이 삶의 목표이자 이유인 사람들은 아직도 수없이 많다. 그리고 그 수는 못해도 전체 인구의 30% 정도는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들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사회경제적 수준으로 따지면 상위 10% 속할  있는 사람들까지도 '생존'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사회경제적으로 상위에 속하는 사람들이 생존의 위기에 처한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곱씹어 보면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말 그대로의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그들이 생존의 위기에 처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존재라는 차원으로 생각한다면 그들 역시 생존의 위기에 처했다고   있다. 바로 '혐오' 대상이 되느냐의 여부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상위에 속한다고 해도 모두가 인정하는 부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부자가 아닌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순간 어느새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다고 하더라도 10억 원을 넘기는 집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아파트가 아닌 주거지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혐오의 언어로 불려지며, 공공임대주택에 산다는 이유로 혐오의 언어로 불려진다. 지금 성공해서 과거에 가난한 것이었다면 가난은 훈장과도 같은 존재이지만, 지금도 가난하다면 이는 자랑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즉, 사회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생존'의 위기에 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배제당하고 손가락질받게 되는 '혐오' 대상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죽음과 동일할 수도 있다. 실제로 혐오의 낙인을 찍고 거친 언행을 보여주는 사람이 소수라 해도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러한 인식에 사람들이 무언의 찬성을 보낸다면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 편안하게 서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상층에 속한 사람들이 '생존'을 걱정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생존' 목을 매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흔히 이야기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처럼 경쟁은 극단적으로 심해지고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승자독식 현상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경쟁에서 승리한 승자라고 해도 자신 또한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패배한 이에게 자원을 나눠줄 여유는 없다. 패배자는 분배를 받지 못하면서 동시에 '혐오'의 대상이라는 딱지마저 받게 된다. 그렇게 승자는 추앙받고 패배자는 자기 자신이 문제라는 낙인을 찍으며 진짜 생존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물론 현재 우리 사회가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고 패배자는 재기불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극단적인 상황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 중심으로 사람들이 구분되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생존자'가 되기 위해 부동산, 주식, 가상자산 등과 같은 각종 자산 시장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두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일상적인 일이다.


관련해서 '공정'이라는 가치가 시대정신처럼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 모른다. 생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던 상위 계층이 언젠가 자신들이 배분받고 있는 자원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면서 자원의 배분 방식이 불공정하다고 지적하게 되기 때문이다. '공정'이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정말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보다 잘 들린다. 그들의 목소리가 큰 탓도 있겠지만 정말 생존의 위기에 몰린 사람들의 상당수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여력도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지금 제기되고 있는 불공정이라는 것에 관심을 둘 여유도 없다.


그러나 '생존'이라는 시대정신을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생존 경쟁 자체가 없어지거나 완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 경쟁이 없어질 수는 없겠지만 경쟁에서의 패배가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시대정신은 바뀔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온갖 이야기가 나오기 좋은 요즘 '생존'이라는 시대정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이야기와 시도들이 잔뜩 등장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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