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코헤인의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을 읽고
공공장소란 곳이 그렇다. 낯선 이들을 혐오할 이유로 차고 넘친다. 글로 써놓고 보면 말도 안 되게 시답잖은 이유들, 가령 다른 사람과 몸이 닿는 게 싫은 내게 몸이 큰 사람은 단지 옆에 와 앉았단 이유로도 혐오의 대상이 된다. 약속에 늦어 마음이 급한데 앞차가 서행 중이다? 마음의 끓는점이 초과되는 데 예열 따윈 필요 없다. 지하철에서 내 가방을 툭 치고 가는 자 (이렇게 공간이 넓은데 왜 하필?), 나이스한 영국인답게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줬더니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자 (내가 도어보이냐?),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통화하는 자 (니 가정사 안 궁금해요!) 등등. 리스트는 계속 이어진다. 언젠가부터 혐오라는 단어가 너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미워한다 정도로 퉁쳤을 상황에서 이제 우린 누군가를 ‘혐오’한다. 나만해도 몇 년 전까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공공장소에서 개인적 공간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개념이 내 안에 자리 잡은 건 언제부터였을까?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자주 가는 카페에서 며칠 전 있었던 일이다. 1층 가장자리 ㄷ자 소파가 크게 들어가 있는 공간에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데, 디자인한 사람의 의도가 뭔진 모르겠으나 붙어 앉으면 족히 15 명도 앉을 법한 이곳엔 테이블이 네 개 밖에 없다. 내가 방문한 그날엔 세 그룹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사람은 넷이었다. 혼자 와 무언갈 작업 중인 사람이 둘. 나머지 둘은 일행이었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음료만 마시면서 굳이 테이블 두 개를 사용하고 있었다. 언짢은 마음으로 일단 자리에 앉았다. 저쪽에선 아무 제스처가 없다. 자리는 텅텅 비는데 내 물건을 둘 곳이 없다. 이런 이기적이고 배려심 없는 놈들, 을 서너 번쯤 되뇌며 음료를 받아왔는데 어느새 내 앞으로 테이블이 하나 옮겨져 있다.
‘죄송합니다. 대화에 집중하느라 못 봤어요.’
또 이런 적도 있다. 지하철에서 임산부 자리에 중년 여성이 앉아 있는 걸 봤다. 나이는 언뜻 보기에 60대 정도? 컬러풀한 등산복을 입은 그는 함께 등산을 한 남녀 서넛과 일행인 듯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생각한다. 분명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임산부가 있으면 와서 일어나 달라고 부탁하면 된다고. 아니, 당연한 권리를 누려야 하는 사람이 왜 먼저 와서 아쉬운 소리를 하게 만들어요. 앉지 말라고 안내방송까지 나오는데, 등산도 척척 하시는 양반이 참.. 한숨을 푹 쉬는데 일행 중 한 사람이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 아이고, 여기 앉으면 안 돼! 그리고, 나이 든 사람이 앉아 있으면 임산부가 와서 자리 비켜달라고 말이나 할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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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낯선 사람을 납작하게 눌러보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들의 인격과 지성이 평균 이하일 것이라 지레짐작하곤 한다. 테이블을 독차지하고, 임산부석에 앉아 자기 혼자 편하면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배려도 할 줄 모르는 얄팍한 사람들이라고 멋대로 결론을 내린다. 평균도 못 되는 무엇으로 생각해야 수월하게 미워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나 많은 사람과의 연결에서 오는 피로감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손쉽게 판단을 내리는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 걸까? 나는 관성에 따라 그들 또한 나처럼 복잡하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만들어진 존재란 사실을 외면하길 매번 선택한다.
최근 읽은 조 코헤인의 책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 (The Power of Strangers)>에선 이걸 낯선 사람을 향한 ‘비인간화’라 불렀다. 나만 이러는 게 아님을 확인해 다행이라 해도 될지 모르겠다. 소설을 읽는 건 인간 내면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며 인간의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글까지 쓴 적이 있는데 결국 다 허울 좋은 말 뿐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딱 그 정도의 인간이라고 인정하면 될 일이지만 내 나름의 변명은 이렇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단 걸 원론적으론 인식하고 있었어요. 내 내면이 복잡한 모순 덩어리인 만큼 남들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단 것 또한, 잘 알겠어요. 그런데 서울 시내에서 하루 반나절만 돌아다녀도 만나는 사람이 수천 명 이잖아요. 예를 들어 난 내게 불쾌감을 주는 사람들 또한 누군가에겐 소중한 사람일 거라고 의식적으로 마음을 다잡아보려 애써 본 적도 있어요. 어쩌면 지금 생애 첫 면접에 늦어 다급하게 뛰어가는 중일지도 몰라. 그래서 경황이 없어 내 어깨를 툭 치고 간 거야. 뭐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건 너무나 피곤한 일이에요. 그거야말로 정신 승리 아닙니까? 그리고 실제로 배려심이 부족하고 심지어 악의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잖습니까?
편리를 위해 누군가를 미워하고 나면 늘 마음에 찝찝함이 남았다. 그 죄책감은 아직 내 안에도 일말의 인간다움이 남아 있다는 걸 확인시켜줬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누군가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해 놓고 난 아직 인간이어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갈팡질팡에 대해 뭐라도 해야 한다. 무슨 이유에서든 혐오는 나쁘니까. 거창한 휴머니즘과 인류애 때문이 아니라, 그건 누구보다 나를 갉아먹는 일이니까. 앞서 말한 책에서 작은 실마리를 찾았다.
마주 앉으면, 그 사람의 생각과 말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 어쨌든 바로 앞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눈을 마주치고, 목소리를 듣고, 신체언어를 관찰하며, 이들이 나보다 사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님을 빠르게 알게 된다. 온전한 인간임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유형에 부합하길 완강히 거부할 때, 이들이 복잡한 존재라는 게 드러난다. 이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벌어지는 많은 논쟁과는 다른 세계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행위를 둘러싼 사회적 통념들과 오해를 넘어 더 많은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접촉하고 대화할 때 비로소 우린 타인을 좀 더 완전한 인간으로 감각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에 대한 신뢰까지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어디까지 실제로 유효한지 지금의 나로선 알 수 없다. 다만 시도해볼 만큼 매력적인 아디이어라고 생각했다. 수천, 수만의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적은 수 일지라도 샘플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스쳐 지나가 다시는 못 볼 사람들에게 특별한 목적 없이 말을 거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대화의 시작은 날씨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서점에서 만난 사람이라면 그 책 괜찮다고, 넌지시 코멘트를 달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가 소개한 다수의 연구와 실험에 따르면 거절당할 가능성은 생각보다 훨씬 낮으며 (10%) 또한 대화를 걸린 사람 대다수가 긍정적인 반응(82%)을 보였다고 한다. 만약 이런 경험을 주기적으로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 대한 희망과 친절로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매일 걷던 무표정한 거리가 건치를 드러내며 내게 씨익 웃어줄 것만 같다.
생면부지의 타인을 종종 미워하고 자책하길 반복하는 나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만남에 대해 마음이 열려있는 편이긴 하다. 그렇게 만나 여태 친구로 남은 경우도 있다. 여태까지 경험한 예상 밖의 조우들이 그렇게 부정적인 경험은 아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난 낯선 타인과 접촉을 통해 ‘더 큰 무언가에 속해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이 과장이 아니란 걸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고마운 사람들 덕분이다. 인생 전체로 보자면 찰나의 불과한 그 시간들이 포개져 하나의 세계관을 이룬 것이라고, 나도 누군가의 삶에 그런 의미로 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다만 그런 접촉들이 대체적으로 여행지와 같은 비일상의 영역에서 이뤄졌단 것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끝없는 현재만이 존재하며 모든 게 아름다워 보이는 여행지에선 애초에 누굴 미워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일상의 영역으로 그 가능성을 끌어와볼 수 있을까?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을 끝내는데 유독 많은 시간이 걸린 이유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뭔가를 시작해야만 할 것 같은데 아직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갈수록 파편화되어 고립과 각자도생의 길로 등 떠미는 시대에 내 안의 편견과 혐오와 싸울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을 지금 나는 알지 못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볼 수 있을까. 내 하루 일과를 기준으로 리스트를 만들어봤다. ‘무관심한 예의바름’에서 조금 벗어나 공공장소에서도 대뜸 말을 거는 사람이 최종 목적지라면 일단 허들이 낮은 곳에서 시작해보자. 자주 가는 커피숍, 김밥집, 오피스텔 경비아저씨가 좋은 시작점이 될 것 같다.
요즘 난 다정함에 대해, 누구를 환대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그리고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겐 서툴면서 불특정 다수에게 다정하려는 내 반쪽짜리 휴머니즘에 대해서도. 하지만 반쪽이라도 분명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니. 그런 대외용(?) 다정함이 확장되어 내 가까운 주변으로 흘러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난 기대하게 된다. 글의 결론에 이르러서야 잠실 교보문고 신간 코너에서 이 책을 만난 10월의 어느 날, 책 제목을 보며 느낀 어떤 ‘돌파구’ 비슷한 예감을 떠올렸다. 20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작년 언젠가부터였던 것 같은데, 한국 사는 외국사람들에게 유독 마음이 가는 걸 느낀다. 그들의 한국생활은 어떤지 궁금하고, 그래서 말을 걸고 싶었지만 선뜻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관심이 타지에서의 오랜 생활로 길러진 이방인의 정서에서 비롯됐음을 난 안다. 그건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단 마음. 돌이켜보니 낯선 이에 대한 내 관심은 여기서 시작됐다. 이 사막에 핀 한송이 꽃 같은 소중한 마음을 있는 힘껏 붙들고 싶다. 이기심과 타인에 대한 오해에서 환대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임을 믿는다.
‘나’는 환대의 장소라는 능동적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을 기쁜 마음으로 추천드린다.
덧,
경청의 기능에 대해 설명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적절한 질문과 함께 누군가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상대는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을 발견하며 때론 자기안에 있는 모순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듣기는 일반적으로 수동적인 행위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매우 적극적인 환대의 행위라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저자는 낯선 타인과의 접촉과 대화가 개인적 수준의 변화를 넘어 양극화와 같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솔루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가능성을 보여준 미국의 Braver Angels 등 다양한 예시가 흥미로운데, 지금처럼 고립/파편화된 사회에 다양한 사람들이 접촉할 플랫폼이 필요하단 건 마이클 센델 또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가장 비슷한 예시는 작년초 몰입했던 클럽하우스다. 물론 초대기반의 시스템이라 대다수의 이용자의 프로필이 비슷했던 건 사실이지만 본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LGBTQ나 장애인 커뮤니티 등 버블 밖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좋은 기회 또한 분명 존재했다. 목소리를 사용해 이야기할 수 있다보니 낯선이와 나 사이 허들을 극복하기도 비교적 수월했고, 이때 흥미로운 대화를 정말 많이 나눴다. 그때와 비슷한 경험을 제공해주는 플랫폼은 이제 없는 것 같다.
낯선이와의 대화가 모든 사람에게 쉽진 않다는 사실을 저자가 짚고 넘어간 건 좋았다. 일반적으로 이런 종류의 대화는 외향적인 사람이 더 잘 한다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 내향/외향 보다는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런 대화에서 이전에 받았던 보상의 경험과 더 관련이 있단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