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seph Nov 29. 2022

설익은 기분

‘아빠가 니 차 김과장님한테 파셨어.’


영상 통화 중 스크린 속의 엄마가 말했다. 2006년식 2-도어 미니쿠퍼 로열그린. 나는 그 차를 사랑했다. 면허 딴 후 첫 차로서 연식이 좀 있는 차가 필요해 중고로 구입한 내 처음이자 마지막. 2000년 미니가 BMW에 의해 미니 쿠퍼로 리뉴얼 된 후 나온 비교적 초기 버젼이라 아직은 모서리가 살짝 각져 있는 그 자태가 맘에 쏙 들었다. 요즘 미니 쿠퍼는 외관이 둥글둥글한 게 미끈한 캘리포니아 감성 같은 걸 연상케 한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첫 차로 미니를 생각했던 이유는 그 차가 가진 어떤 영국스러움에 매료 되었기 때문이었고, 내게 있어 그 영국스러움이란 매끄러움보단 투박함에 가깝다. 2006년식 미니쿠퍼는 과거 미니가 대표했던 감성과 현재의 모던함, 그 사이 어디쯤 위치 한다는 게 내가 부여한 나름의 의미. 물론 그 외에도 그 차를 사랑할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먼저 완벽한 색상 - 요즘 출시되는 미니의 초록보다 무게감 있는 로열그린이다. 스코틀랜드 퀼트에 어울릴 법한 어두운 색감의 초록. 이 또한 내가 생각하는 영국스러움에 부합했다. 여기에 키덜트 감성을 자극하는 내부 대시보드 디자인과 후진할 때의 태엽감는 소리 같은 것들이 자칫 고지식해보일 수 있는 ‘영국느낌’에 위트 한 스푼을 더해준다. 심지어 이 차는 번호판 마저 맘에들었다. ‘LV05 YUB’가 묘하게 LOVE YOU 처럼 보였거든.



런던 시내 한 복판에 있었던 교회를 가기 위해 주로 일요일날 차에 올라탔지만 운전에 조금 자신이 붙은 이후론 근교로도 종종 나갔다. 최장거리는 캠브릿지 왕복이었으니 300km 남짓 쯤 됐으려나. 한창 운전으로 넓어진 활동범위로 재미를 보고 있을 때 펜데믹이 시작됐고, 이후 2년 동안 격리의무가 다양한 형태로 계속 되면서 운전을 할 일도 없었다. 그러다 한국엘 왔으니 도합 3년 남짓 운전을 했고 최근 3년은 차 문도 열어본 적도 없는 샘이다. 못 본지 오래 돼서인지 갑작스런 소식에도 덤덤했지만 내가 종종 그 차를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매주 집 근처 카페 가는 길에 보이는 초록색 미니쿠퍼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또래들보다 운전을 늦게 시작했다. 이래저래 서른 쯤 돼서 면허를 땄다. 오랫동안 내게 운전을 한다는 건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 처럼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본격적으로 운전을 한지 몇 년이 지나고도 시동을 걸 때마다 묘한 간질거림 같은 게 있었다. 어색함에 가까운 기분이었던 것 같다. 나 지금 뭔가 대단히 어른스러운 행위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런던 시내를 가로지르고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는 그 어른스런 모습을 관찰자의 눈을 통해 느낄 때 스스로를 대견히 여겼다. 바깥에서 보면 수천 수만대의 차 중 한 대에 불과했겠지만. 글로 쓰자니 좀 창피하지만. 남녀노소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운전을 한다는 건 내게 그런 의미였었던 것이다. 굳이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차’란 게 주는 그런 특별함이 있었던 것 같다. 이따끔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탈 때면 아니, 내 친구가 운전을 하다니? 자기 차가 있다니, 뭔가 어른이 된 것 같잖아?


그런 순간들이 더러 있다. 가령 좀 일찍 결혼을 한 친구들은 이미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냈을 나이지만 아직도 친구의 아이를 보는 건 어색하다 (난 결혼은 커녕 그에 준하는 깊은 연애를 해본 적 조차 없는데!) 그리고 친구의 아내를 ‘형수님’혹은 ‘제수씨’로 부를 때. 혹은 밤 늦게 노포에서 친구의 잔에 소주가 또르르 채워지는 그 소리가. 모두 내겐 어떤 ‘설익음’의 정서와 연관되어 있단 생각이 든다. 내 30대는 늘 그런 준비되지 않은 듯한 기분에 시달렸다. 하고 싶은 걸 찾아 여기까지 온 사람이라 스스로를 소개할 때마다 날 동시에 방어적으로 만드는 그 무엇.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은 이제 너무 자연스러워 보여 내색하기가 더 힘들어지는 나의 못갖춤, 혹은 자격지심 같은 것. 내 초록 미니쿠퍼는 그 모든 설익음들의 상징이었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데는 20-30대 대부분을 보낸 영국이란 환경이 끼친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주변인들의 나이는 계속 비슷하게 유지되는데 나만 계속 나이가 들어가는, 흡사 네버랜드 같은 곳이었다. 당시 영국은 비유럽권이 취업하기 수월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업계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취업 비자 스폰서를 받아야하는 비유럽권 사람은 비자가 필요 없는 유럽인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실력이 요구됐다. 그래서인지 영국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은 졸업 후 영국에 남는 경우가 잘 없었고, 나는 매년 그들을 보내며 그 땅에 남아 있었기에 내 주변인들의 나이는 학부 졸업과 석사 사이 어디쯤에서 꾸준이 유지됐다.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탈 일도, 친구의 아이를 안아볼 일도, 더 나아가 졸업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도 희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사회생활 중인 또래 친구들은 언젠가 떠날 땅에서 일시적으로 머물며 끝없는 적응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처음 한국으로 돌아왔을 땐 흡사 새로운 현실로 3단 높이 뛰기를 한 것 같았다. 휴가로 잠시 놀러 왔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주변인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보며 ‘내가 잘못 살 건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내 나이쯤이면 해야 하는, 알아야 한다는 것들에 충실한 삶들을 보며 과연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준비가 됐다는 게 뭘까 생각한다. 나도 방향은 다르지만 분명 내 나름대론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젠 연락이 뜸해진 친구와 신년 인사로 ‘올해는 더욱 철들지 말자’라고 매년 말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신년 계획을 나만 성실히 이행한 건지, 지금도 나를 피터팬 같다고 하는 친구들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칭찬처럼 들리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길, 잃은 게 있으면 당연히 얻는 게 있고, 설익은 기분에 시달리면서 내가 획득한 나름의 삶의 가치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지금의 고민은 그걸 잘 긍정하면서도 그간 놓친 것들에 대한 나름의 책임을 지는 삶이다. 그럼에도 부동산 이야기, 투자 이야기,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움츠려 드는 나에 대해, 뭐가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감정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 한국에서 언제 운전을 다시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서른을 한참 지나 마흔을 바라보는 언젠가 핸들을 다시 잡아도 난 아마 비슷한 기분을 느낄 거란 거. 그때도 내 차는 초록색 미니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환대의 장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