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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백수 Jul 25. 2019

열 번째 슛: 서두를 것 없네

서른에게



 스물 한두 살 때 쯤, 그러니까 일주일에 술을 여덟 번(하루에 두 번 먹던 날 도 있었으니까)쯤 먹던 개망나니 시절, 학교 과방 쇼파에 누워 노닥거리고 있는데 후배 민혁이가 이런 말을 했다. 


 “형, 형은 정말 서른까지만 살 것처럼 사는 것 같아요.”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서른 이후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서른은 저만치 멀고 시간은 하루하루 더럽게 안 가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는 시간이 점점 빠르게 흘러갈거라는 건 몰랐다. 더럽게 안 가던 하루가 조금씩 조금씩 빠르게 흐르더니 나는 별로 한 것도 없이 서른이 되어 있었다. 


 커트코베인은 스물일곱에 죽었다. 짐 모리슨, 지미 핸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에이미 와인하우스, 윤동주, 이상. 그들보다 좀 더 산 나는 별다른 업적 없이 팔리지도 않는 것들 몇 개 만들고 허송세월 하고 있었다. 공부는 했으나 당장 아는 게 없고, 사랑은 했으나 당장 아무도 없는 나의 서른. 그래서 그 해에 나온 내 앨범 제목이 ‘설은’이었다. 낯설고, 설익고, 서러운 나이인 것 같아서. 


 시간은 조금 더 흘러 나는 서른셋이 되었다. 설문조사 같은 걸 할 때 이십대 칸 옆의 삼십대 칸에 체크를 하는 게 이제는 전혀 낯설지 않다. 그리고 나보다 네 살 어린 내 여동생이 삼십대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동생은 이십대의 마지막을 일본에서 보내기로 했는지, 편도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공항으로 데려다주는 길에 조수석에 앉은 동생이 말했다.


 “오빠, 내가 이제 곧 삼십대야.”

 “그러네. 좀 조급해지나?”

 “그런 건 아닌데. 어때? 삼십대는?”


 나는 갓 서른이 되었던 삼 년 전이었다면 하지 못했을 대답을 했다.


 “재밌어. 난 이십대보다 더 좋아.”


 진심이었다. 서러운 마음으로 시작된 나의 삼십대는 의외로 이십대보다 재미있다. 그때처럼 온갖 것들이 신기하지는 않지만, 그대신 안목과 취향이라는 게 희미하게나마 생겼다. 재밌는 것, 좋은 것, 맛있는 것을 알고 찾아서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또 생각해보면 이십대 내내 나는 얼마나 궁핍했는가. 교통카드를 충전하기 위해 주머니에 넣어둔 만 원 짜리 한 장을 술값 계산하는 친구에게 쥐어주고 지하철 개찰구를 몰래 넘어가다 붙잡혀 과태료 통지서를 끊어야 했던 그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이라고 풍족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지지리 궁상을 떨어야 하는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연애는 또 어땠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김광석 노랫말대로라면 나는 이십대 내내 사랑 한 번 못 해본 가련한 인간일 것이다. 안 아픈 사랑이 없었고 그 앞에 안 서툰 순간이 없었다. 삼십대의 그것은 그때처럼 좌충우돌하는 맛은 없지만 그보다는 평화롭고 때때로 못지않게 뜨겁다.


 서른이 서러웠던 것은 단지 서른쯤에는 무언가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른이 스스로 무언가 이룰수 있기나 한 나이인가. 십대까지의 내 삶을 온전히 나의 인생이었다고 하면 좀 억울할 것 같다. 그저 시스템이 원하는대로 착실하게 십대를 마친 뒤에 맞이한 이십대는 비로소 나의 인생이 시작되는 지점일 뿐이다. 그때 이미 무언가를 이룬 비범한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그들이 별난 것이지, 누구에게나 시작은 넘어지고 깨지는 경험의 순간일 뿐이다. 


슬램덩크 완전판 5권, 이노우에 다케히코, 대원


 북산고등학교 농구부는 능남과의 첫 연습시합에서 아깝게 지고 말았다. 그건 당연한 결과다. 2, 3학년들이 출전한 능남과는 달리 북산은 강백호나 서태웅 같은 일학년들과 만년 후보였을 이달재 같은 후보들이 경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만 했다. 그야말로 새 출발하는 팀의 첫경기에서 200개가 넘는 팀들 중에 4강에 꼽히는 강팀 능남을 이긴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우리들의 서른 살도 마찬가지. 이제 막 진정한 내 인생의 첫 십년이 지났을 뿐인데 양손에 대단한 어떤 것이 들려 있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경기를 마치고 분해 죽겠다며 씩씩대는 백호에게 북산의 안 감독은 이야기한다. 


 “홋홋홋~ 백호군. 서두를 것 없네. 지금부터니까 말일세.”


 서른을 눈 앞에 둔 내 동생 같은 친구들에게도, 그리고 이십대보다 좋은 삼십대를 보내고 있지만 이따금 고개를 드는 내 조급함에도 ‘홋홋홋~’ 웃으며 같은 말을 해주고 싶다. 서두를 것 없다고. 지금부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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