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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백수 Oct 05. 2020

안녕하세요, ‘문학과 음악의 요정’ 강백수입니다

월간 <현대시> 2020.10 '시인들의 사생활' 코너

안녕하세요, ‘문학과 음악의 요정’ 강백수입니다.


 ‘문학과 음악의 요정’. 내 별명이다. 별명은 대부분 남들이 붙여주기 마련이지만, 이것은 내가 지어서 줄창 자처하고 다니다 보니 별병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문학과 음악의 신’은 너무 거창하지만, 요정은 그냥 우리의 삶 여기저기에서 흔하게 노닐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 그렇게 짓게 되었다. 내 별명처럼 나는 문학과 음악으로 대부분의 나날을 보내고, 밥벌이도 하고 있다.  


 그게 쉽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처음의 계획은 이러했다.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들 하는데, 좋아하는 일 하나로 부족하다면 두 개 정도 같이 해서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 좋아하는 일이 두 개여서 가능했던 일이다. 시인으로 등단한 것이 첫 앨범을 내는 것보다 먼저였지만, 먼저 사랑했던 일은 음악이었다. 어느 선배는 내게 “시쓰기와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뭐하러 시정잡배처럼 기타를 치고 다니느냐”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나는 둘 중에 어느 일이 더 좋거나 덜 좋지 않았고, 더 우월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처음 시를 쓰게 된 것은 ‘교수님을 잘 만나서’였다. 시 쓰기라는 행위에 매혹을 느낀 것은 순전히 은사님이셨던 故이승훈 교수님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언제나 시인이셨던 선생님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을 뿐이었다. 사람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던가, 선생님의 시에 대한 욕망을 흉내내다 보니 그것은 언젠가부터 나의 욕망이 되어있었다. 선생님의 시창작 수업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한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선생님의 연구실에 습작물을 들고 찾아갔다. 그렇게 한 두 해가 지나고, 나는 시인이 되어 있었다.


 처음 음악을 하게 된 것은 ‘친구를 잘 못 만나서’였다. 시 쓰기를 시작하기 몇 해 전,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나는 아버지께 베이스기타를 사달라고 졸랐다. 베이스를 치고 싶어서라기보다, 밴드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서 그저 폼으로 집에 한 대 두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그 무렵 ‘록밴드부’활동을 하던 친구 한 명을 사귀었는데 그 녀석은 내게 베이스기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유혹의 말들이 있었지만 가장 주효했던 말은 “남자 중학교를 졸업하고 남자 고등학교에 들어온 우리에게 여자친구가 생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밴드를 결성해서 여자 고등학교 축제 무대에 서는 것 뿐이야.”라는 말이었다. 그 때부터 밴드 활동은 나의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취미가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좀 더 본격적으로 밴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친구들을 모아 새로 결성한 밴드는 홍대 앞의 라이브 클럽에서 연주를 하고 어설프게나마 싱글 앨범도 낼 만큼 본격적이었다. 친구들의 어깨 너머로 기타 연주를 조금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어설픈 실력으로 아무 코드나 뚱땅거리다 처음으로 자작곡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친구들이 취업을 위해 밴드를 떠난 뒤에도 나는 내가 만든 노래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도무지 음악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때 쯤 나는 직접 연주를 하며 노래까지 하는 싱어송라이터로 활동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대학원 사회와 문단에서 ‘딴따라’라는 딱지를 달게 될까봐 본명인 강민구가 아니라 ‘강백수’라는 예명을 지어서 활동하기로 마음 먹고 앨범을 냈다. 그게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다. 


 싱어송라이터는 결국 가수다. 가수가 직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수는 회사원들처럼 어떤 집단과의 계약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의사나 변호사, 택시운전기사처럼 라이센스를 취득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직업도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나 혼자 앨범을 내고 스스로 가수임을 선언했지만 그것은 단지 좁은 내 방에서 일어난 일일 뿐, 나에게 무대를 내어주는 곳은 딱히 나타나지 않았다. 밤마다 나는 홍대 거리에 기타를 메고 달려가 노래를 불렀다. 나를 찾아주는 무대가 없으니 스스로 무대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실력을 쌓고, 몇 명 안 되지만 팬도 생겼다. 홍대 도처에 있는 공연장에서 오디션을 봤고, 이따금 내게도 작게나마 무대가 주어지게 되었다. 직접 만든 앨범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팔고, 이따금 지역 축제 같은 데도 불려가 돈을 받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때쯤부터 나는 스스로를 ‘가수’, ‘싱어송라이터’라고 칭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내게 시 쓰기와, 싱어송라이터 활동을 병행하는 것이 버겁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 두가지 일이 크게 다르지 않다. 시나 음악이나 결국은 언어의 불완전성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믿는다. 누군가가 가진 감정이나 생각을 일상언어로 백 퍼센트 정확하게 표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일상언어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언어체계를 획득하게 되었고 그것이 다듬어져 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상언어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음악적 요소를 통해 채워넣는 방법을 취하기도 하였고, 그것이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머릿속에,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고개를 들고 무언가 써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면 나는 그것을 어떤 때는 시로 써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노래로 써 보기도 한다. 그러다 잘 안 풀리면 시로 쓰던 것을 노래로 써 보기도 하고, 노래로 쓰던 것을 시로 써 보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나는 한정된 글감을 다른 창작자들보다 경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세 장의 정규앨범을 냈고, 최근 드디어 첫 시집도 묶어냈다.


 시인으로, 싱어송라이터로 활동을 하다 보니 각각의 장르에 대한 아쉬움도 느끼곤 한다. 시는 점점 난해해지고, 그만큼 대중들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중가요는 점점 강렬한 사운드가 중시되며 과거에 가졌던 문학적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시가 대중가요만큼 애송되고, 대중가요가 시만큼 아름다운 언어를 품고 있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고 들었다. 지금 나의 야망은 거기에 있다. 단지 난해하게 쓰는 것에서 벗어나 대중들로부터 더욱 커다란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시, 그리고 세련된 사운드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창작자가 되는 것이 나의 야망이다. 누군가에게는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박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별명처럼 양쪽 분야에서 ‘음유시인’으로, ‘문학과 음악의 요정’으로 인정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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