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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민 Oct 05. 2021

덕질은 같이 하고 싶었습니다만...

당분간 여기는, 러시아 모스크바


모스크바에 오기 직전, 임신 초기, 지난 3-4월쯤 됐었나?

이미 아들 둘 엄마가 된 대학 동창을 만나 물었다

'아기 낳고 남편이랑 사이 어때?'


괜히 물었을 리 없다.   

임신 직후, 남편이 모스크바로 먼저 떠나고, 우린 매일 전화 통화를 했는데

일단 모스크바와 서울 시차가 딱 반나절 (6시간)이라 전화 타이밍이 안 맞는 것부터 문제였다.

퇴근 후 전화를 하는 게 가장 좋은데 여기 저녁이면 모스크바는 잘 시간이었다.

다양한 시간을 시도한 끝, 내가 출근하기 전 / 남편 점심시간에 통화를 하게 됐는데,

나도 출근 준비로 바쁘고 남편도 점심 먹고 커피라도 한 잔 마시려면 오랫동안 통화하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유한하니, 나는 아주 집약적으로 초기 임산부의 고충을 털어놓았는데,

먹고 싶은 게 하나도 없는 '무욕의 입덧'

쏟아지는 잠

임신 초기라 아직 회사에 말도 못 하고 있던 때였는데 눈치 없이 밀려드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텅 빈 집에 혼자 남겨진 외로움...

그냥 마음이 외로운 게 아니라, 집 자체가 추워졌었더랬다.

외로움은 참 추운 감정이다.


와다다다 내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남편의 위로와 공감을 바랐는데 남편의 반응은 항상 무덤덤했다.

그렇겠네 ->  어떡하지? -> 그러니까 얼른 와

소울리스한 리액션 3종세트를 번갈아 하다가 둘 중 한 사람이 '나 이제 끊어야겠다' 하고 대화는 종료되기 일쑤였다.

 

주말이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전화할 여유가 생겨도 남편은 워낙 말재주가 없는 편이라 내 하소연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고,

또 심각한 이야기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타입이라 내가 한참 진지하게 얘기를 하고 있자면

갑자기 ‘그런데 말이야’하면서 신변잡기 화제로 전환해버리는 탓에 나의 화를 돋우곤 했다.

 

남편이 미웠다.

임신 기간은 부부 로맨스의 황금기라는데.

지금 이러면 아기를 낳고 나면 이 남자가 얼마나 더 미워질까 걱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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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낳으면 부부 사이?

남편이 진짜 말도 못 하게 미워. 발로 걷어차버리고 싶어


아들 둘을 낳고도 참 예쁜 대학 동창이 미간에 굵은 주름을 잔뜩 만들며 말했다.


근데, 그래도 하나 좋은 건, 남편이랑 같이 덕질하는 느낌?


"우리 아기가 월드스타고, 우리 부부는 사생팬 노릇하는 것 같거든. 애들 예쁜 옷 입히고 사진 찍어 모으는 재미로 살아."


일면식 없던 사람들도 좋아하는 스타가 같으면 그 소재로 금세 하나가 되는 것처럼 친구는 남편이 엄청 밉다가도

하루 동안 아이한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서로 하하호호 너무 즐겁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팬클럽까지는 아니었지만 G.O.D 팬이었는데, 친구들하고 ‘호영이가, 계상이가…’ 수다 떨고, 사진도 모으고, 필통도 만들면서 정말 즐거웠던 게 생각났다.


실제로 남편은 스포츠광, 나는 월드컵과 올림픽 때 아니면 스포츠라는 단어 자체를 잊고 사는 사람.

나는 영화를 정말 좋아하지만, 남편은 천만 관객 영화만 겨우 보는 사람이라 함께 열광할 공통 소재가 없었다.

그런 남편과 우리 아기 덕질이라. 그것 참 신나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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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말. 드디어 모스크바에 왔다.

몇 주 뒤, 태동을 느끼기 시작했고,

한국처럼 3D 컬러 퀄리티는 아니었지만, 모스크바 산부인과에서 초음파로 아기 얼굴도 봤다

(딸인데 남편 이목구비를 똑 닮아서, 약간 걱정되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제 모스크바 온 지 4개월.

출산을 한 달 앞두고 아기 용품들을 준비하면서 나는 이미 우리 아기의 충성 팬, 덕후 중의 덕후가 됐다.   


이럴 수가

그런데 나와 같이 덕질을 해줄 줄 알았던 남편의 팬심은? 너무나도 미적지근하다.

 

태동으로 배가 꾸물꾸물할 때, '어머! 우리 아기님 활동적이기도 하지'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불렀더니

'우와. 에어리언 같다'라고 하질 않나.

뭐라고? 감히 우리 아기님께 에어리언?

 

얼마 전에는 아기 옷 빨래를 하면서 조그마한 양말을 보는데 너무 예뻐 기절할 것 같았다.

잔뜩 흥분해서 역시 남편을 불렀는데  

'되게 작네, 잘못 산거 아니야?’

끝이야? 네가 잘못된 건 아니고?

 

친구 말에 따르면 분명 같은 덕질 멤버가 된댔는데, 우리 남편은 왜 이모양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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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친구에게 물었다. 내 남편에게 문제 있는 게 아닌지, 아니면 임신 초기에 떨어져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말이다.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남자들은 아기가 태어나야, 그러니까 만져지는 '실물'이 생겨야 그제야 자기가 아빠가 됐고, 사랑할 존재가 생겼다는 걸 실감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언니들이나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도 비슷한 답변이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자기 남편은 아이가 ‘아빠’하고 부르고 나서야 자기가 아빠인 줄 알더라고 했다.

(마치 김춘수의 시 '꽃' 처럼;;;)

  

기대가 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같이 입덕해서 같은 농도로 덕질을 하고 싶었는데, 덕질은 그렇게 해야 제 맛인데...

남편이 의심의 여지없이 완벽한 우리 아기님의 매력에 빠질 때까지 더 기다려야 한다니.

 

더 걱정되는 건 팬심이 있어야 육아 전투에 참전할 동력이 생길 텐데, 남편이 나보다 아기에 덜 '미쳐서' 육아에 소홀하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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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런 고민은 육아 선배들에게 핀잔 또는 놀림감이었다.

아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남편들이 육아에 참여하기를 바라다니. 꿈 깨라는 거였다.

육아에 있어서 남편에게 자발성을 바라지 말고, 구체적으로 집요하게 지시해야 한다고 했다.

 

아니, 왜! 남편도 성인이고 사회인인데, 왜 시켜야만 한다는 걸까?

육아가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이뤄진다고 생각해보자.

상사가 구체적으로 집요하게 시키는 일만 하려 하는 직원은 없다. 우리 모두 귀에 딱지가 않게 들었다. "이보세요, 00씨! 일은 찾아서 해야죠"라고.

우리들의 남편이 상사에게 그런 소리를 아직도 들을 정도로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은 아닐 거다.

그런데 왜 유독 육아와 집안일은 시켜야만 하는 것이며, 여자들은 지혜롭게 시키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건가.

너무나도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이건 모든 아내의 공통된 불만인지 남편 다루기 또는 남편에 대한 기대 버리기는 방법론 책이 끊임없이 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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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욕을 해도 너무 했나 싶은 이 시점.  

러시아 남자에 대한 설을 잠깐 풀어보자면...


어쩌면 이게 한국 혹은 동양 남자의 정서일까 싶어서 러시아 남자들은 어떤가 여기저기 물어봤다.

그런데 여긴 설상가상이다.


혹시 '러시아 허세남 시리즈'를 본 적이 있는지.

어깨에 딱 각 잡고 ‘형님’ 자세를 하고 있는 러시아 남자가 자신의 어깨각을 지키느라 방문을 못 지나가서 계속 부딪히는 것부터, 바나나를 껍질 채 닭다리 뜯듯 먹는 것까지. '남자다움 판타지'에 빠진 러시아 남자를 희화화하는 영상으로, 전 세계적으로 Meme이 됐던 콘텐츠다.  

 

푸틴이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괜히 웃통 벗고 곰도 때려잡을 수 있다고 외치는 게 아니다.

러시아 남자들은 ‘남자다움’을 아주 중요시한다.

 

조금 더 실질적인 예로, 러시아에서 ‘게이’는 사회적 매장의 대상이라고 한다.

'게이 같다'는 말은 육두문자보다도 심한 욕이라고.

대도시의 젊은이들은 거부감이 좀 덜하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그들에게 '네 자식이 게이면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물으면 ‘그건 안되지’라고 반응한단다.

 

이런 분위기라서 당연히 남녀의 스테레오 타입도 공고한 편이다.

러시아 포털 사이트 ‘얀덱스’에 지금도 종종 남자가 집안일을 어디까지 ‘도와야'(참여가 아니라, 돕는 개념)하는지에 대한 포스트가 올라올 정도니 말 다했다.


러시아 남녀의 가사분담에 대한 분석글을 읽었는데, 러시아 남자들에게 집안일은 여성에게 자기희생 정신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쇼잉'의 혹은 '유혹'의 수단이지, 함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의무 개념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거리에 유모차를 끌고 있거나 공원에서 아이와 놀아주고 있는 남자는 많이 봤지만, 생활 육아의 영역에서 남자를 본 기억은 거의 없는 듯하다.

산부인과에서 아내와 동행한 남편을 본 적이 없고(주말에도), 육아 용품점에서도 남자를 본 적이 없다.

물론 모스크바에 짧게 살아본 경험에 근거한 거라 편견이 섞여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 상황을 보니, 내 남편 이렇게(?) 된 게, 러시아 사람들과 어울려서 그런가 생각이 들 정도다.

나랑 산부인과에 같이 가면서 '나 같은 남편이 없다'며 러시아 남편식 쇼잉을 하곤 하니까.

우리 부부가 공동육아가 일상화돼있다는 북유럽 국가에서 주재원을 시작했다면 남편이 좀 나았을까?


현시점을 기준으로, 남편과 나의 '아기 팬심'이 다른 층위에 있는 건 분명하다.

아기를 배에 품고 있기에 육아에 대한 책임감이 직접적으로 와닿는 나와 달리 남편은 어쨌든 한 발자국 떨어져서 임신, 출산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니, 아이가 태어나야 육아가 당면 과제로 보일 거라는 친구들의 말이 일면 이해도 된다.


결국은 기다리고, 서운해도 계속 대화하고, 신입사원을 대하는 마음으로 일을 자꾸 주고, 봐주고 해야 한다는 건데...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남편은 언제쯤 능동적인 아기 덕후가 되려나.



**혹시 남자들의 심리에 대해 설명이 가능하시거나, 저희 이해를 도울 책을 아신다면 댓글이라도 남겨주세요 흑흑.

 



[덧붙임]

모스크바의 가을



요즘은 기후변화 때문에 한국의 가을도 참 짧지만, 모스크바의 가을은 정말 정말 짧다.

그래도 어느 나라든 가을은 참 예쁜 계절이다.

1-2주 전부터 슬슬 단풍이 들더니, 요즘은 거리에 노란 잎이 수북하다.

자박자박 밟고 다니고 싶은데, 러시아 사람들은 겨울에 눈 치우는 습관이 있어서 그런지, 길에 뭐가 쌓이는 것을 참 싫어하는 것 같다. 조금이라도 쌓이면 환경미화원 분들이 번개처럼 치워주신다.

오늘 아침 TV에서는 '낙엽을 청소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로 시민 인터뷰까지 하더라.

(젊은이들은 예쁘니 두자 / 어르신은 지저분하니 치우자는 반응이었다)


가을 이벤트도 많다.

대표적인 게 러시아 푸드 페스티벌인데, 9월 말경부터 10월 초까지 유명 레스토랑들이 저렴한 가격에 테이스팅 코스를 내놓는다.


붉은 광장 바로 옆에 있는 포시즌 호텔이나, 스탈린이 세웠다는 모스크바 7대 고층 건물 '우크라이나 호텔' 등의 고급 레스코랑 음식을 우리나라 돈으로 3만 원 안 되는 가격에 먹어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호텔 스카이라운지 '부오노'(BUONO)' 테이스팅 메뉴. 안심 스테이크와 애피타이저로 오징어 감자 샐러드, 생굴 '하나'가 세트였다>


올해는 이미 행사가 끝났지만, 내년에 모스크바에 오실 분들이 있다면 꼭 가을에 와서 단풍도 밟고 푸드 페스티벌도 가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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