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당분간, 러시아 모스크바
오늘은 나의 호구 에피소드를 털어놓아 보려고 한다.
해외에 이방인으로 살려면 뒤통수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잠깐 해외여행만 가도 그런데, 해외에서 살자면 더 튼튼한 맷집이 필요한 게 당연하다.
내가 가장 자주 뒤통수를 맞는 곳은 바로 약국. 러시아어로 압떼까(аптека)다.
러시아에는 약국이 정말 많다. 거의 한국의 편의점 수준으로 많다. 24시간 문을 여는 곳도 흔하다.
모스크바에 처음 왔을 때는 아프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약국들이 많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해외 생활을 할 때 섣불리 '다행'이라는 단어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스크바 도착 일주일 후 처음 산부인과에 갔다 오던 날. '어라? 모스크바 약국은 좀 이상하네?' 하게 됐다.
병원에서 오메가 3와 비타민 D 같은 임산부에게 필요한 약들을 처방해줘서 병원 옆 약국으로 갔는데 처방전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약사가 약이 없다며 고가의 다른 약을 추천해줬다.
러시아의 처방전은 우리나라 같은 제조약 방식이 아니라 기성 약 제품명을 적어주는 방식이라서 처방전에 적힌 약이 없으면 다른 제조사의 약을 추천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의아하긴 했다.
그 이후로도 서너 집을 돌아다녀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다들 동일한 성분이라며 고급스러워 보이는 수입 약을 추천했다.
내가 다니는 산부인과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곳으로, 규모도 크고 시설이 좋아서 모스크바에서 꽤 유명한 병원이다. 그런데 이 병원 근처 약국에 그 병원 의사가 처방한 약이 없다니.
결국 차를 좀 몰고 나와서 시내 중심가에 있는 대형 약국을 찾아갔는데, 처방전을 보고 약이 있는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또 다른 약을 추천하는 거다. 노르웨이에서 온 천연 오메가 3와 비타민이라며 약사가 '오친 하라쇼(이거 되게 좋은 거야)'를 연발했지만, 그런 약들은 사실 온라인에서 약국 가격보다 더 싼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는 것들이라 약사에게 됐다고 하고 돌아섰다.
출입문 앞까지 다다랐을 때 약사가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약 선반 맨 위칸에 짱 박혀 있던 처방전의 바로 그 약을 꺼내 주는 거다. 가격은 약사가 추천했던 노르웨이 약의 십 분의 일.
이렇게 적극적으로 세일즈를 뛰는 약사들이라니.
러시아 약국의 첫인상은 경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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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약국만 가면 난 무조건 호구 당첨.
러시아 약국은 우리나라 '올리브영' 같은 개념이라 약뿐만 아니라 이른바 약국 화장품이라 불리는 아벤느, 비쉬, 피지오겔 같은 브랜드 제품들과, 칫솔, 위생용품을 함께 파는데, 한 번은 핸드워시를 사야 하는데 얼굴 세정제를 사버려서 교환을 해달라고 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영수증 밑에 '7일 내 교환 가능'이라고 분명히 적혀있는 데도 말이다. 영수증의 그 문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약사에게 '이것 좀 보세요' 말해보았지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있나. '뒀다가 쓰지 뭐'하고 돌아설 밖에.
비슷한 에피소드가 또 있다.
며칠 전, 약국에 가서 얼굴 보습 크림과 바디 크림을 하나씩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동일한 브랜드의 작은 사이즈 크림 하나, 큰 사이즈 크림을 건네줬다. 작은 건 얼굴, 큰 건 바디용이라고 하면서
별생각 없이 집에 와서 뜯어보니 두 개가 같은 제품. 하하하하하.
겉포장에는 러시아어만 적혀있었는데, 박스를 뜯으니 두 제품 모두 동일한 영어 이름에 동일한 제품 설명이 적혀있었던 것
이 정도면 이건 코미디다.
한편으로는 내 잘못이지 싶었다. 두 개를 조금만 더 들여다봤어도 뜻은 모를지언정 박스 겉면에 같은 문양의 글자'가 적혀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뒀다가 쓰지 뭐'
역시 어쩔 수 없다. 억울해해 봤자 내 손해다.
듣자 하니 주위 지인들도 약국에서 뒤통수 맞은 경험들이 허다한 듯했다.
누가 더 크게 호구를 잡혔나 한참 동안 각자 일화들을 털어놓으며 깔깔깔 물개 박수를 쳤다.
긴 성토대회 끝, 결론은
'해외 살면 이 정도 호구 잡힐 각오는 해야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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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약국이 이래도 되는 건가, 이게 흔한 일일까, 너무 궁금해서 구글링을 해봤더니
"왜 러시아에는 내가 원하는 약이 없나요?"
"러시아 약국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 약사가 맞나요?" 등등 질문들이 가득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도 나와 같은 '호구 에피소드'들을 꽤나 겪은 모양이다.
그러다가 한 외국인 블로거가 쓴 글을 보게 됐다.
러시아에서 내가 원하는 약을 구하기 어려운 건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 식약청이 일을 열심히 하기 때문이란다.
러시아에서는 보통 유럽, 미국에서 약을 수입해서 쓰는데, 해외 제약사가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불러 가격 협의를 하느라 수입이 잠정 중단되기도 하고, 엄격한 러시아 약품 유통 기준과 부합되지 않아 갑자기 수입 금지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
이런 이야기를 러시아어 선생님한테 했더니 현지인들도 원하는 약을 구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그래도 약사들이 추천하는 약을 사기보다는 의사한테 대체약을 처방해달라고 하는 게 좋단다.
러시아 약국에서는 진짜 약사와 단순 판매 직원을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에 섣불리 추천 약을 샀다가 유의사항이나 부작용을 놓칠 가능성이 많다는 것.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말했다. 그래도 러시아 약값이나 병원비는 아주 싼 편이라고.
실제로 그렇다. 내가 찾아 헤맸던 오메가 3의 경우, 석 달은 족히 먹을 수 있는 사이즈의 시럽이었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3000원 수준이었다.
병원비의 경우, 난 건강보험 혜택을 못 받는 외국인이니 어쩔 수 없이 비싼 돈을 내고 산부인과를 다니고 있지만, 러시아 국적의 산모라면 거의 무상 수준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어디든 다 그럴 말한 사정이 있고, 불편한 게 있으면 득 보는 것도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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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이 중문과라 대학교 2학년 때 중국 북경으로 교환학생을 갔었다.
2000년대 중반, 2008년 북경 올림픽 전이라 당시 북경은 지금 러시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사나운 곳'이었다.
거기서 뒤통수 맞지 않으려고 매 순간 정신 바짝 차리며 아등바등하다가 귀국했는데 아랫배에서 종양이 발견됐다.
그냥 똑 떼내면 되는 별것 아닌 놈이었지만,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는 걸, 나는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알게 됐다.
주먹 꼭 쥐고, 이 악 물고 살던 여대생이었던 내가 어느덧 삼십 대 후반이 됐다.
이제는 어느 정도 힘 빼고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나이.
이렇게 조금은 성장한 모습으로 러시아에 와서 다행이다.
물론 아기를 낳고 (어느덧 한 달 정도 남았다!!! 두근두근)
육아와 관련된 일에서 뒤통수를 맞는다면 광분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웬만한 일은 '그럴 수도 있지 뭐'라는 정신으로 내려놓고 넘어가야겠다.
전 세계인이 다 아는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이 고깟 약국에서 호구 잡힌 사람들을 달래려고 이 시를 쓴 것은 아닐 테지만,
내 상황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인용해보자.
러시아가 나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
호구의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영광의 날이 오리니
[덧붙임]
러시아는 요즘 가을장마가 한창이다.
하루 종일 흐리고, 가는 비가 오다가다 하는데
그래도 이 빗속에서 드라이브를 할 때면, 은근히 분위기가 난다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모스크바, 요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