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긍정민 Oct 13. 2021

러시아에서는 미안하지 않기로 해

당분간 여기는, 러시아 모스크바


러시아 사람들은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잘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러시아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지금 남편과 함께 모스크바 주재원으로 나와있는 남편 회사 동료에게서 들은 말이다.


몇 주 전에 아기 침대 배달 지연 사건을 곱씹어봤다.  

(택배사에서 오늘 오전 10시에서 밤 10시 사이에 물건을 배달해준다는 메시지를 보내서 날 집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해 놓고, 택배기사가 연락 없이 오지 않는 양치기 소년 짓을 나흘 동안 자행한 것)

 

그러고 보니 나는 택배원에게서도 택배회사 고객센터에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오히려 나만 택배원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러시아어를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미안해서 

'죄송한데 제가 러시아어를 못해요'라고 사죄했을 뿐.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이케아에서 작은 테이블을 샀는데 조립에 꼭 필요한 나사 하나가 잘못 들어있는 걸 발견했다.

요즘 러시아 고객센터는 한국처럼 실시간 채팅 형태가 많은데, 이케아 사이트에서 아무리 메시지를 남겨도 답이 없길래 하는 수 없이 남편과 매장에 직접 가기로 했다.


다행히 매장 고객센터 점원이 영어를 할 수 있어서 불량품 나사를 보여주니

어깨를 으쓱하며 '오, 그러네?' 하더니 맞는 나사를 가져다주겠다며 창고로 들어갔다.


점원이 사라진 뒤, 30분 넘게 기다려서 나사 하나를 받았다.

재고 나사가 없어서 새 상품을 뜯어서 나사를 가져왔다고 했다.


"오, 스바시바 발쇼이!!!"(대단히 감사합니다라는 뜻)

새 상품을 뜯었다는 말에 우리는 감사인사를 연발했다.

너무 기쁘고 뿌듯했다. 어쨌든 해결이 됐다는 생각에!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게 우리가 감사할 일이었나 싶다.

불량품을 바꾸러, 고객센터가 연락이 안 돼 매장까지 직접 가 놓고서 우린 뭐가 그렇게 감동적이었던 걸까.

 

우리나라 같았으면 사정을 말하자마자 일단 점원한테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사과를 받았을 거고

기약 없이 고객센터 복도에 서있지 않았을 것이고,

애당초 우리가 직접 매장에 가지 않아도 되도록 나사를 택배 같은 것으로 보내줬을 수도 있다.



---------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컴플레인을 꽤나 자주, 잘하는 편이었다.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따박따박 따져서 사과를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한마디로 좀 재수 없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따지기는커녕, 먼저 사과하고 먼저 고맙다고 하고 있다니!



잠깐 억울하다가 이내 나라는 사람이 한없이 치사하게 느껴졌다.


우리나라에서 소비자는 언제 어디서든 아주 쉽게 사과를 받아낼 수 있다.


"아이고, 이런... 많이 불편하셨죠"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기다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말 / 많이 / 대단히 / 아주... 인용할 수 있는 모든 정도 부사를 활용해 사과를 하고,

사과 후에는 사은품, 만약 온라인 사이트였다면 고객 포인트라도 챙겨주는 게 한국의 서비스다.


나는 이런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깐깐하고 집요한 불평불만러가 됐던 거다.


-----------


나의 불편을 초래한 건 이케아 고객센터 직원이 아니다.

고객센터 직원이 테이블 부품을 포장한 게 아니니까 말이다.


내 아기 침대의 택배 기사도 농땡이를 피우다가 택배를 미룬 것을 아닐 거다.

배달 알림 시스템과 택배 기사 간 뭔가 소통 오류가 있었던 거겠지.


러시아 사람들은 자신의 귀책이 아닌 일에 굳이 조직을 대표해서 인사치레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에 대해서만 책임지고,

딱 그 범위 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만 사과 혹은 감사를 하는 것.

이게 러시아 스타일이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이건 좀 슬프기도 하다.


러시아 사람들은 애당초 약속을 잘 믿지 않는단다.

택배 배송일은 물론, 회사에서 상사와 약속한 보고서 데드라인, 공사 완료일 등등

모두 날짜를 박아놓기는 하지만 그대로 될 확률은 반반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러시아 사람들 얼굴이 항상 심각하고 우울해 보이는 건, 서로를 믿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라



남편 동료로부터 들은 러시아인의 '사과 철학' 이야기를 러시아 선생님한테 했더니, 선생님도 십분 동의하면서 한 말이다.


하지만 먼저 사과하지 않고 서로를 믿지 않는 매정함이 러시아 국민성을 대표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일단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그때부터는 완전 무장해제된다고.


예를 들면, 오래 본 이웃에게는 스스럼없이 열쇠를 맡기고, 급전이 필요하면 빌리러 가기도 한단다.

추운데 집 열쇠가 없어서 집에 못 들어갈 때는 옆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고도 했다.



한마디로 정리해보자면,

러시아 사람들, 참 화끈하다.



이런 러시아에서 상처 안 받고, 상처 안 주고 잘 살아가기 위해,

소비자라면 '사과 서비스'도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의미 없는 아집을 버려야겠다.

그리고 이제 나도 굳이 미안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미안하다고 하지 않을 테다.


특히! 러시아어 못해서 미안하다고는 절대 절대 하지 말아야지.


내가 러시아어를 못하듯 상대방도 한국어를 못하는 건데, 상호 모두 미안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이즈비니쩨(извините)"

"쁘로쉬 쁘라쉐니야(прошу прощения)"


러시아 기초 회화책에서는 안부 인사 다음으로 사과 인사가 안내돼있다.

회화책 옆에 적어둬야겠다.

1. 러시아어에서 '미안합니다'는 리스닝용이 아니라 스피킹용

2. 무분별한 사과를 경계하기

 


[덧붙임]


볼 만하다, 모스크바 미술관



모스크바에는 미술관, 박물관이 참 많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에르미타주(hermitage라는 뜻)'라고 세계 3대 미술관도 있고 말이다.


미술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은 편이라 모스크바의 장점으로 특별히 와닿지 않았는데, 얼마 전 아주 흥미로운 전시를 봤다.


호주 출신으로 무대미술을 하다가 지금은 베를린에서 순수미술을 하고 있다는 '제니아 하우스너(xenia Hausner)'의 전시 "True Lies".



모스크바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는 대형 미술관, '푸시킨 미술관' 신관에서 열린 특별 전시였는데,

구관은 고대, 중세 미술작품이 전시돼있고,

바로 옆 신관에서는 19세기 근대 미술 (마티스, 피카소, 고갱 등등의 대표작 포함)과 현대 미술가의 특별 전시가 열린다.


관광객에게는 구관이 단연 더 유명하지만,

신관에서는 한국에서 보는 현대미술 전시와는 또 다른 색깔의 유럽 대륙 작가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으니

러시아에 올 기회가 있다면 푸시킨 미술관 신관을 포함, 현대미술전에 한 번쯤 가보면 좋을 것 같다.


 * 왼쪽부터.

홍콩 쪽방 풍경 > 낯익은 얼굴 '김정은'도 보이고 > 난민들의 탈출 모습 > 홍콩 국제학교의 크로스 컬처에 대한 그림


작가의 이전글 덕질은 같이 하고 싶었습니다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