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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민 Nov 12. 2021

러시아에서 엄마가 됐습니다_2

남편이 제왕절개 현장을 직관하는 러시아


제왕절개의 여파는 나보다 남편에게 컸다.

수술실에 남편이 동석했기 때문이다.

내가 가림막 뒤에서 하반신 마취하고 비몽사몽하고 있는 동안, 남편은 의사가 내 배를 가르고 아기를 꺼내는 장면을(표현이 무시무시하지만, 이게 사실이니까) 그야말로 '직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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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오전 정기 진료를 갔던 나에게 지금 당장 제왕절개를 해야한다고 통보(?)한 뒤, 우리에게 모든 출산 과정을 부부가 함께 하겠냐고 물었다.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우리 둘다 그게 제왕절개 수술 순간을 포함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으니까.


오전 10시.

내가 제왕절개 수술대에 눕는 순간, 남편이 파란색 방역복(?)을 입고 들어왔고, 마치 관람석에 앉듯 수술실 문 옆 간이 의자로 안내받았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남편은 모든 것을 봤다. 거의 산부인과 인턴 실습 수준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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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가르고 아기를 꺼내는 건 아주 순식간이었다

하반신에 감각이 없어지고, 의사가 손으로 배를 문지르나 싶었는데, 배에 뭔가 묵직한 것을 올려놓더니 '이게 네 아기야' 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다 눈물이 왈칵 나왔다.

그 순간, 남편은 벙쪄있었다.  

아기가 세상을 마주하는 순간은 완전히 야생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외양간에서 송아지를 받듯, 나의 탯줄을 잡아 아기를 순식간에 건져? 낚아? 올렸다고 한다.

 

'아기 천사 탄생'같은 아름다운 수식어와는 전혀 딴판인 장면이었다고.


잠시 후, 탯줄로 건져 올린 아기의 건강 여부를 체크한 뒤, 나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차례로 아기를 품에 안겨줬다.

정신 없는 와중에 의사에게 아기가 몇 키로냐고 물었다.


2.7kg... 너무 작았다.

단동맥도 단동맥이었고, 막달에 소화가 너무 안 돼서 많이 못 먹은 탓에 37주에 태어난 것 치고도 아기가 너무 작았다.


아기 체중을 듣고 다시한번 나를 자책하는 동안 수술 후처리를 위한 수면 마취 기운이 돌았고, 이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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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경.

수술 후, 3시간여만에 회복실에서 눈을 떴다.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아 내가 정말 아기를 낳은 건지 어리둥절하고 있던 와중,

내가 깨어난 것을 확인한 산파가 아기를 내 가슴에 아기를 올려주었다.

3kg도 안되는 작은 것이 입을 오물거리며 내 가슴팍으로 들어왔다.


아침에 병원 진료를 왔던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겨우 4시간만에 아기를 낳았고 엄마가 됐다.

매년 12월 31일, 연말 시상식 사회자를 따라 10초 카운트다운을 하다보면 부지불식간에 해가 넘어가고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 처럼, 엄마가 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이렇게 엄마가 돼도 되는 걸까


나는 조금 더 어리둥절하면서 엄마가 되기까지의 모든 순간들을 곱씹고 싶었는데, 러시아 병원은 날 기다려주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러시아식 '빡쎈' 산후 회복 코스가 시작된 것이다.


쓸 수 있는 진통제는 다 써서 산모를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게 하고, 얼른 일상으로 복귀하게 하는 것.

러시아는 아기를 낳고 산모가 골골대고 있는 '꼴'을 눈감아 주지 않았다.


자세한 러시아식 제왕절개 회복 코스는 다음 회차에 쓸텐데,

얼마나 하드코어한지 한 가지 실례만 적자면.


난 수술 후 바로 물을 마셨고, 수술 후 6시간만에 소변줄을 빼고, 복도를 걸어야했다.


러시아는 산모에게 잔인하리만치 엄격했다.



[덧붙임]

아기를 낳고 어느덧 한달이 다 돼가고 있다.

이제 겨울이다.

정말 겨울.


오늘 아침 모스크바에 첫눈이 펑펑 왔다.


모스크바에 사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모스크바의 설경!

"수유-기저귀교체-다시 수유" 죽음의 레이스 중이라 눈을 밟아보는 건 언감생심이다.

대신 아기를 안은  창밖 전경을 찍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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