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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 Bird Sep 10. 2022

가지 않은 길

하와이 사는 이야기 10

2004. 4.22


살다 보면 가끔씩 옛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고달픈 시절이었어도, 아무리 배고픈 시절이었서도 내 머릿속에 추억으로 간직되어 온 그 시절을 되돌아보고픈 심정은 아마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낯선 하와이에 처음 와서 영어 배우려고 드나들던 학교 근처에 오늘 가봤다. 전에는 옛 시절이 생각날 때마다 자주 가봤지만 벌써 안 가본 지 한참이다. 다운타운에 있는 학교,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들이 벌떼처럼 웅성거리고, 대학 앞 특유의 젊은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다. 


학기 첫날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학교 앞에서 내린다는 것이 두 정류장 전에 내려서 첫 시간부터 늦을까 봐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10여 년간 배운 죽은 영어 때문에 입이 안 떨어지고 귀가 안 뚫리는 시절, 누가 말 시킬까 봐 교실 한쪽 구석에서 불안한 모습으로 움츠리고 앉아있던 모습도 보인다. 말이 잘 안 통해서 맥도널드나 버거킹에서 햄버거 하나를 사 먹는 것도 어려워서 쭈뼛주뼛하던 그때의 모습도 보이고, 주문을 하면 못 알아듣는 캐쉬어들을 섭섭해하며 그들이 내가 모르는 다른 말을 할까 봐 무서워하던 그때가 생각난다. 집에 가는 버스를 잘못 탄 적도 있을 정도니… 그 시절에 비하면 참 많이 변한 지금, 그때가 그립다. 


2021.03.15


이민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어리바리하고, 뭔가 불안하고, 말로 표현이 잘 안돼서 답답한 마음을. 언어가 잘 안되고 그 사회를 잘 모르니 나이 들어왔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다. 차라리 어린아이였으면 괜찮다. 겉모습과 머릿속의 생각은 어른인데 정작 그 사회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말로 의사 표현도 잘 안된다. 그래서 말을 잘 안 하게 되고 스스로를 탓하기만 한다. 요즘엔 세계 어디에 살아도 인터넷 덕분에 한국과의 단절감이 없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한국말이 그립고, 노래가 그립고, 친구가 그립고, 그립지 않을 것 같았던 것들까지 그리웠다. 


외국에 사는 햇수가 늘어가면서 누구나 변화의 사이클을 겪게 되는 것 같다. 그 변화의 사이클에서 현지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싸이클로 튕겨나가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적응을 잘하게 되면 정착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적응을 잘 못해도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을 수 있고, 적응을 잘해도 돌아가야만 하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그 경계에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처음에 몇 년 살아보고 싶어서 유학 왔다가 직장이 생기면서 졸업하고 주저앉게 된 케이스다. 일단 일자리가 있으면 많든 적든 수입이 생기게 되고, 그 수입으로 생활이 가능하게 되면 정착하게 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 같다. 체류신분 문제도 중요하다.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신분이 주어지면 정착할 가능성이 커지고,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불법으로 체류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항상 불안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24년을 하와이 한 곳에서 살았다. 미국이 넓은 것은 사실이고, 체류 신분이 되면 어디서든 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곳에서 오래 산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일자리 때문일 것이다. 잘 다니고 있는 회사를 그만두고 떠나기도 어렵거니와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이사 가서 자리잡기도 쉽지 않다. 현재 가진 것에 연연해하다간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다. 현재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새로운 기회가 생기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지내다 보면 세월이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고 나이 들수록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이 더 어려워지게 된다. 


나는 영주권을 받은 후 뉴욕으로 가려고 했던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그때가 2004년이니 위의 일기를 쓰던 때 즈음이겠다. 하와이에 온 지 7년째 되던 해였다. 학교도 졸업했고, 영주권도 받았고, 하와이에도 그만큼 살았으니 다른 곳으로 떠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뉴욕에서 MBA를 하며 임시로 일을 해보려는 생각을 했었다. 세라는 그때 9살이었다. 가족이 함께 움직여야 했으니 일단은 일자리가 필요했다. MBA는 그다음이었다. 그런데 예정된 뉴욕 회사와의 일이 잘 안되면서 주저앉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으로 간다면 당장의 수입이 끊기게 되는 것이다. 당분간은 있던 돈으로 버틴다고 해도 어려운 생활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때 뉴욕으로 이사했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떠난 것을 무척 후회하고 어렵게 살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보다 훨씬 만족하며 살고 있을까? 뉴욕에서는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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