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900-1920년: 혁신과 반동
규제되지 않은 기업의 권력이 계급 격차를 심화하고 공장과 도시의 삶을 끔찍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성직자와 도시 개혁가들이 일어났다. 캔자스주의 찰스 쉘던 목사는 <In His Steps: What Would Jesus Do> (1896)를 펴내 미국의 암울한 이면을 직시할 것을 요구했다. 선거개혁, 노동조합 지원, 정부의 기업규제, 안전하지 않은 공장과 아동노동 금지가 요구되고 금주운동이 일어났다. 주 단위로는 노무자 산재보상법(메릴랜드주 1902), 여성노동자 하루 최대 10시간 노동법(오리건주, 1903), 최저임금법(매사추세츠주 1912) 등의 조치가 있었다. 의회는 식품의약품법과 식육 검사법을 통과시켰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를 정점으로 하는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Board)이 통과됐고, 연방거래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가 창설됐다. 1913년에는 연방소득세를 재가하는 수정헌법 16조와 연방상원의원을 주의회 간접선거가 아닌 시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하는 수정헌법 17조가 통과됐다.
유럽 열강이 경제적 이득을 위해 중국에 압력을 가하던 1899년과 1900년, 국무장관 존 헤이는 중국에서 미국의 상업적 이익을 확고히 하는 문호 개방을 발표했다. 중국에서 반외세 봉기 의화단 반란이 발생하자 서구 열강이 군대를 파견했는데, 미국도 참여했다. 미국은 전함, 구축함, 지원선박으로 구성된 함대를 구성해 세계를 순회했다. 루스벨트는 라틴아메리카에 상습적 비행이 발생되면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1914년 프랑스 운하 건설회사가 실패한 파나마 운하 건설을 성공시켰다.
1914년 오스트리아의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얼마전 병합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방문 중에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에게 총격을 당하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러시아가 세르비아 편에 섰다. 프랑스, 영국, 러시아가 연합국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동맹국으로 연합하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탈리아는 중립을 지키다 1915년 연합국에 가담했다. 미국의 윌슨은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미국의 은행들이 영국과 프랑스에 대출을 확대하면서 연합국을 지원하게 되었고 많은 미국인들이 연합국의 대의에 공감했다. 1915년 독일 잠수함이 영국 여객선 류시카니아호를 침몰시켰는데 그중 128명은 미국인이었다. 미국은 독일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전쟁에 참여했다.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군대를 철수시키자 미국 원정군은 곳곳에서 독일의 진격을 막아냈고, 25만 명 이상이 전선에 배치되었다.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1차 대전으로 약 1,000만 명의 군인과 700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미국은 러시아, 프랑스, 영국에 비해 손실이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미국 내 사회도 큰 변화를 겪었다. 남부의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북부의 공장에 취업했으며, 전시에 고용의 기회를 가진 여성들이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1917년 뉴욕주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고, 1920년 수정헌법 19조가 통과돼 여성 참정권이 시작됐다. 금주법을 내용으로 하는 수정헌법 18조는 1919년 비준되었다. 평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독일계 미국인이 박해를 받았다. 1918년 연합군과 독일이 휴전에 합의하며 전쟁이 끝났으나 미국은 러시아의 새로운 공산주의 체제와 맞서게 되었다. 윌슨은 국제평화유지 기구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관철시켰으나 상원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러나 1945년에는 국제연맹을 계승한 국제연합(United Nations)에 합류했다.
미국 이민
미국이 이민자의 나라라고 하는데 미국 이민은 어떻게 시작된걸까? 미국 이민 역사는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 북유럽국가에서 미국의 농장에서 일하려는 사람들이 유입된 것을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식민지시대인 1607년 버지니아의 담배농장이 번창하며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에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국이 17세기 중반부터 미국을 식민지로 다스렸기에 영국에서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이 신대륙에 건너왔다. 이들의 이주형태는 계약노동이었다. 운임과, 집, 음식, 옷, 직업훈련 등 모든 비용을 식민지의 농장 고용주가 대고 21세가 될 때까지 또는 5~7년간 무급으로 일하는 방식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고 계약이 끝나면 자유신분이 되었다.
그후 1620년 종교적 자유를 위해 영국의 필그림 (필그림은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한 영국 성공회에 반대하는 비국교도로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이주했다.) 백여명이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정착했다. 1629년부터 1640년까지 수만명의 청교도가 (청교도는 교황이 아니라 성경중심의 개신교로 도덕과 근면을 강조했다) 매사추세츠 보스턴을 중심으로 커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뉴햄프셔 등 뉴잉글랜드지역에 정착했다. 이들의 직업은 농부, 무역업자, 수공업자 등 다양했다. 이들이 자녀의 교육을 위해 1635년 세운 학교가 하버드 대학이다.
네덜란드는 1626년부터 뉴욕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허드슨강을 따라 인디언들과의 무역을 위해 뉴암스텔담과 알바니 같은 도시를 건설했다. 뉴암스텔담은 후에 영국이 접수하면서 뉴욕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어 퀘이커교도가 팬실베니아로, 스웨덴과 핀란드인들이 델라웨어로 이주했다. 1680년이래 뉴욕과 펜실베니아가 위치한 중부지역에 유럽의 개신교 신자들이 종교의 자유와 신대륙에 대한 희망을 품고 이주했다. 그 60% 이상이 영국인, 30% 정도는 독일인이었다.
1717년부터 60년간은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 얼스터 지역에서 장로교도들이 종교적 자유와 기근을 피해 대거 이주해왔다. 이들의 수는 25만~ 40만에 이르며 대부분 팬실베니아에서 조지아에 이르는 농장지역에 정착했다. 농장이 많은 남부지역은 계약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18세기 초부터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온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많이 들어왔다. 18세기 말 이지역 인구는 영국인 55%, 아프리칸 아메리칸 38%, 독일인 7% 였다. 스페인계는 플로리다, 텍사스, 멕시코를 중심으로 거주했고 후에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에 정착했다. 프랑스계는 미시시피강을 따라 디트로이트와 루이지애나에 정착했다.
1790년 인구센서스에서 86%가 영국계이고 독일 9%, 네덜란드 3.4%, 프랑스 2.1%, 스웨덴 0.25%로 집계됐다. 1840년대 중반부터 카톨릭교도들도 이주해 개신교도 비율이 95%에서 90%로 감소했다. 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에서 7만명이 미국국적을 갖게 됐다. 1849년 골드러시로 미동부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유럽, 호주, 중국에서 10만명이 유입되었으며, 캘리포니아가 인구 9만명으로 미국의 주로 편입됐다.
1830년부터 1930년까지 350만의 브리티시계와 450만의 아이리시계가 들어왔다. 1850년부터 1930년까지 5백만의 독일계가 들어와 중서부에 정착했다. 1880년이후에는 대형 증기선의 개발과 유럽철도 덕분에 유럽인들이 더욱 쉽게 이주해올 수 있었다. 이에따라 15~30세 사이의 유럽 젊은이 2천500만명이 미국으로 대거 이주했다. 이들은 영국과 독일뿐 아니라 이태리, 그리스, 헝가리, 폴란드 등에서도 많이 왔다.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도 1840년부터 1930년 사이 퀘벡에 거주하던 90만명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뉴잉글랜드에 이주했다가 절반정도만 돌아갔다. 이민자들은 도시지역에 거주하며 발전하고 있는 철강, 석탄, 자동차, 섬유 등 산업 전반에 노동력을 제공하며 미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태생의 뷰유한 백인층을 중심으로 급증하는 이민이 미국의 보건과 안전을 위협한다며 이민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남북전쟁 이후 일부 주에서 이민법을 제정했으나 연방정부는 1875년부터 이민법을 연방차원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연방정부는 1875년 아시안 계약노동자 이민을 제한하는 아시안제외법을 만들었고, 1882년에는 중국인제외법을 통과시켰다.
유럽에서 이주해오는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1880년부터 1920년 사이 이태리에서 530만명이 들어와 그중 절반이 남았고, 같은 기간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150만명이 들어와 미네소타와 다코타에 정착했다. 19세기 초에서 20세기 후반 시리아와 레바논인들도 들어와 뉴욕을 중심으로 거주했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많은 수가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중서부로 이주했다. 의회는 비숙련이민자를 제한하기 위해 영어시험, 이민쿼터제도 등을 도입했다. 1921년 의회는 국가별 이민인구를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북중서유럽 국가를 선호하고 동남유럽은 제한하고 아시아는 아예 금지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규정을 두지않아 멕시코와 중남미에서의 이민은 자유로웠다. 2차대전 전후 1941년~ 1950년 사이 독일, 영국, 캐나다, 멕시코, 이태리에서 1백만명이 들어왔다.
1965년 국가별 쿼터가 폐지되고 가족이민, 취업이민 등 카테고리로 분류하는 새로운 이민법이 통과됐다. 이에따라 그동안 막혔던 중국, 필리핀, 한국, 인도, 파키스탄, 아프리카 등 아시아와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밀려 들어왔다. 2021년 현재 미국인구는 백인 59.3%, 히스패닉 18.9%, 아프리칸 아메리칸 12.6%, 아시안 5.9%, 아메리칸 인디언 0.7% 로 집계됐다. 2045년에는 백인인구가 49.7%로 감소하고 히스패닉 인구는 24.6% 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