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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믜 Mar 29. 2023

설문지 하나로 포용성을 보여줄 수 있다면

[밀려난 생각들] 설문조사의 성별 문항에 대해 생각하다

디자인 리서처이자 UX컨설턴트로 업무를 하면서 설문지를 만드는 일이 종종 있다. 설문지는 보통 설문에 참여한 응답자의 인구학적 정보를 묻게 된다. 설문응답자의 연령, 성별, 또는 직업군 등이 설문의 답변에 영향을 미치거나, 답변의 경향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대상자 선정을 위한 스크리닝 설문이라면 인터뷰 대상자를 고루 분포시키거나 또는 특정 분류에 있는 대상자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인구학적 정보를 묻곤 한다.


인터뷰 대상자 선정을 위한 스크리닝 설문지를 만들던 어느 날, 나는 성별 문항에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성별을 다음 보기 중 선택해 주세요.
◽️남성
◽️여성


성별이 남성과 여성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닌데 꼭 이렇게 만들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보기를 더 넣을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내가 남성 또는 여성 한 쪽으로 규정할 수 없는 성별을 가진 사람으로서 설문에 응한다고 가정한다면 이 질문은 차별로 느껴졌다.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조사에 응할 뿐인데 성별을 원치 않게 규정해야 한다면 얼마나 소외감을 느낄까. 성별이 이 조사에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다른 곳에서도 이미 소외감을 느끼는데 설문에 참여하는 순간 마저 불쾌할 수 있다면 이는 설문에 참여하는 사용자로서의 경험이 분명 좋지 않은 것이고, 나는 리서처로서 이를 정정해야 했다.



이런 생각은 유난스러운 게 아니다.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는 다양한 성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서구권에서는 특히 동성 결혼 제도, Pride Month 캠페인 등 제도적, 문화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는 디지털 서비스에 적용된 지도 오래다. 미국의 IT기업 메타(Meta)는 무려 9년 전인 2014년 페이스북(Facebook)의 성별 선택 항목에 50가지의 성별 옵션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소셜 네트워크에서 성별을 나타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다양한 성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도록 선택 항목을 드롭다운 방식을 사용하여 50여 개나 되는 선택옵션을 담은 것이다.


Facebook Screenshot


 (출처: Here Are All the Different Genders You Can Be on Facebook)




설문조사와 같이 목적을 가지고 조사를 한 후 분석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서 페이스북처럼 50여 가지의 성별을 모두 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설문조사 플랫폼 서비스인 서베이몽키(Survey Monkey)에서도 성별 문항에 대한 가이드를 제시한다. 아래 이미지에 있는 예시에서는 [남성 / 비규정 / 여성 / 직접 작성] 이렇게 네 가지를 제공한다.

Image source from Survey Monkey

(출처 Why (and how!) to ask survey questions on sexual orientation and gender identity)



성별 질문에 두 개의 문항이나 할애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라이스 대학의 Utpal M. Dholakia, Ph.D., 교수는 아래 이미지와 같이 [여성 / 남성 / 트랜스젠더 / 기타(직접 입력) / 응답을 원하지 않음] 이렇게 다섯 가지 보기를 제시하기를 권장한다.

Source: New method of measuring gender in surveys by Utpal Dholakia

(출처 How Should Market Researchers Ask About Gender In Surveys?)





그래서 나는 설문지 초안을 만들던 당시 고민 끝에 문항 보기에 ‘기타’를 추가했다. 두 가지의 익숙한 성별 옵션 외에 한 개의 보기를 추가하면 포용성을 향상시키면서도 분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의 사용성 테스트는 성별이 조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주제였다)


내가 만들었던 서베이몽키 설문지 초안



하지만 결과는? 내부 승인이 나지 않아 이전처럼 남성/여성으로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유는 아래와 같이 여러 가지가 있었다.

   

클라이언트와 협의된 부분이 아니라서 

→ 이제 협의하면 되지 않을까?


클라이언트가 남성/여성 두 가지로 성별을 분석하길 원해서 

→ 그건 애초에 성별이 두 가지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기타’에 체크된 응답자에 대해 분석해 본 적이 없어서 

→ 이제 해보면 되지 않을까? / 혹은 성별이 중요하지 않다면 묻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국내 정서상 준비되지 않아서 

→ 이건 편견. 우리가 디자인 리더로서 리딩할 수 있지 않을까?



클라이언트가 두 가지의 성별만을 언급했더라도 디자이너/디자인 리서처가 먼저 나서서 “성별은 이제 두 가지로만 보지 않습니다. 다양한 성별을 포괄한다면 설문조사 참여 경험을 증진시키고 기업의 이미지를 우호적으로 개선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려 미래 고객경험의 방향을 제시하는 UX컨설턴트니까. 이 조직에서 하는 리서치는 다양한 성별을 포괄한다고 알려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설문조사의 성별 문항에 소외되지 않고 설문에 충실히 응답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남성과 여성 외의 성별 보기를 보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최근 앱 몇 가지에 회원가입을 했는데 성별 옵션이 세 가지 이상으로 제공되는 것을 보았다. 

이렇다니까. 우린 뒤쳐져도 한참 뒤처졌다.


러너블 - 회원가입 화면



(위) 달리기 챌린지 러너블회원가입 화면. 국내 정서에 어울리게 '기타'추가했다.


(아래) 스포츠 활동 기록 및 공유 앱 Strava의 회원가입 화면. 성별 입력란에 '이분법적 성별 아님'과 '밝히고 싶지 않음'옵션을 제공한다. 입력 항목 옆 물음표 아이콘을 클릭하여 성별 기입을 요구하는 이유도 상세하게 설명했고, 다른 사용자와 경쟁할 수 있는 서비스의 특성상 사용자의 카테고리가 어떻게 내부 알고리즘에 적용되는지까지를 설명하고 있다.
















Strava 회원가입 화면




이 외에도 이분법적 성별 외 옵션을 제공하는 설문지나 서비스가 있다면 자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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