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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버거 Jan 01. 2024

촘촘한 첫날

연말에 한 해를 돌아보며 2023년과 2022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희미해야 할 22년보다 막 지나고 있는 23년 기억이 훨씬 허술했다. 이럴 수가, 깜짝 놀랐다. 정리해 보자면 23년은 회사로 봐서는 대략 상고하저와 '큰일 났다' 정도로만 기억에 남아있고 일상사는 대체 뭘 했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살았는지 흐릿하기만 하다. 차이의 원인은 글쓰기에 있었다. 2022년에는 21년 12월부터 시작한 글쓰기가 쭉 이어졌었다. 10월 브런치북 출간 프로젝트 마감 때까지 글을 100개쯤 썼다. 반면 23년은 거의 안 쓰다시피 했고.

재작년에 쓴 브런치 글은 지금도 제목만 봐도 그날 무엇을 했는지, 무슨 생각과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세세히 기억한다. 작년은 억지로 기억을 하려 해도 그냥 뭉뚱 거린 덩어리만 겨우 식별할 뿐이다. 22년은 자세히 기억이 나는 촘촘한 1년 다운 1년, 2023년은 후룩 지나는 한 달 같은 1년이라고 볼 수 있다. 수명이 단축된 것 같다.


올해 일상의 목표는 글쓰기와 혼술 금지, 두 가지다. 혼술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 되면 하기로 하고, 글쓰기는 양이라도 재작년만큼 쓰려한다. 올해 반드시 해내야 하는 아주 아주 중요한 회사 일도 기록으로 남길만하고, 자칫 놓치기 쉬운 내 하루하루도 작년처럼 그냥 흘려보내기 싫어서다.   


몸풀기 겸 모처럼 하고자 한 일을 모두 실행한 오늘 하루를 글로 박제한다.


6:50 am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휴대폰 화면 하단 5분 연장 칸 바로 위까지 손이 갔다. 습관적이다. 멈칫, 잠이 덜 깬 손이 가늘게 떨린다. 잠깐 머뭇하다 바로 위 알람 해제 버튼을 터치했다. 이불을 휙 걷고 두 발을 50도쯤 들었다가 허공으로 차는 반동으로 벌떡 일어났다.


7:20 am

회사 근처 명진슈퍼에서 담배 한 갑을 사고 500원짜리  믹스 커피 한 잔을 받아 들었다. 마시며 네이버 일기예보로 일출 시간을 확인했다. 7시 36분이다. 물고 있던 담배를 급하게 끄고 차 시동을 걸었다.


7:35 am

회사에서 50m쯤 걸어 나와 앞산(정확히는 용두산) 능선이 보이는 골목으로 내려갔다. 바다나 산 정상이었으면 예고 시간에 해가 떴겠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에선 아직 해가 보이지 않는다. 10분쯤  밖에 서 있으니 춥다.

매일 뜨는 해, 그까짓 게 뭐라고, 그냥 들어갈까, 아니야 아니야, 새해 첫 일출인데, 시작은 뜨는 해와 함께 하기로 한 첫 다짐부터 어길순 없다. 춥지만 기다리기로 한다.


8:05 am

황금빛 햇살이 부챗살처럼 회색 구름을 비추기 시작하더니 시시각각 해가 떠오른다. 구름이 많아서 일출 보기 힘들 것 같다고 했는데, 다행이다.

첫날 첫 단추는 잘 끼웠다. 콧물이 조금 났다.

10:48 am

일출을 보고 와서 두 녀석 밥을 주고 모래통을 치우고 청구서와 세금계산서 발행을 했다. 다 돈 받는 일이다. 저녁에 출고할 제품 박스들을 트럭에 상차하기 쉽게 정리했다. 시간이 훌쩍 지난다.

운동은 되도록 오전에 해야 한다. 오후가 되면 건너뛰기 십상이다. 산책용 운동화를 10분쯤 째려봤다. 아... 하기 싫어라... 에잇, 미루면 미룰수록 더 하기 싫어진다. 나가자.

장부 마감과 돈 나가는 매입 청구서 정리는 미뤄두고 운동화를 갈아 신고 산책을 나섰다.

어제는 2023년 마지막 산책, 오늘은 2024년 첫 산책. 굳이 나눈다.

오르락내리락 산길을 3.08km 걸었다.

50분 걸렸다.


12:54 pm

사우나에 갔다. 올해는 내 사업에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 어떻게든 해내면, 큰 분기점이 될 일이다. 기도라도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다. 주위에 우물이 없으니 정화수 떠놓고 비는 것까지는 못하겠고 목욕재계라도 하는 심정이다.

목욕탕을 나와서 세븐일레븐 삼각김밥을 점심 삼아 먹었다.


2:11 pm

수성못이 한눈에 들어오는 커피숍 2층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켰다. 독서 밴드에 새해 인사 포스팅을 써서 올리고 이 글을 시작했다. 손도 생각도 굳었음을 절감하며 끙끙 앓으며 깜빡이는 커서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3:30 pm

SNS에 커피숍이라고 올렸더니 친한 동생 둘이 놀러 왔다. 겨우 시작한 글을 멈추고 수다를 떨었다. 오래간만에 각 잡고 쓰는 글인데... 어렵게 어렵게 열댓 줄 쓰고 탄력 받을만했는데... 흠.


4:54 pm

회사로 돌아왔다. 용달 트럭은 다섯 시 반에 오기로 했으니 시간이 좀 빈다. 이 글을 마저 써야겠는데 달았던 마음이 식었다. 내일 쓰면 첫날 글이 아니게 되는데... 컴퓨터를 켜고 글 쓰던 화면을 불러낸다.


5:40 pm

기사가 예정보다 일찍 왔다.

빠르게 상차를 마쳤다. 어둑다.


6:10 pm

저물녘, 배는 고프고, 술 생각이 난다. 첫날부터 술? 그건 좀 아니지. 계획에도 없던 일이고.

집으로 들어왔다.

냉장고 찬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해물경단 몇 개 굽고 뒷베란다에 있던 뭇국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불을 댕겼다. 거의 첫 끼다. 허겁지겁 먹었다.


새해 첫날, 하고자 했던 일은 다했다.

미루거나 건너뛴 일은 없다.

마루 벽에 걸린 새 달력 첫 장을 땠다.

2024 숫자가 유난히 도드라저 보인다.


8:48 pm

이 글을 다 썼다.


9:38 pm

퇴고 끝.


올해 12월 31일에는 1월 1일을 분 단위로 촘촘하고 생생하게 기억할 다. 오늘의 기분과 느낌도 함께.

글쓰기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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