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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버거 Jan 12. 2024

새해 액땜

연말에 둘째가 독감에 걸렸다. 밤에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니 그렇지, 둘째는 아픈 것도 서러울 텐데 엄마 야단도 들어야 했다. 아내는 마스크를 꺼내 썼고 나는 쓰지 않았다. 월말에 아프면 마감에 지장이 큰데도 쓰지 않았다. 한집에서 숨 쉬고 밥 먹고 자는 마당에 마스크로 막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건강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다. 애써 피하던 아내는 며칠 후 옮았고 나는 1월이 돼도 괜찮았다. 복불복이든가 평소 운동하는 습관의 차이일 거라고 믿었다. 가끔 미열이 있거나 가벼운 몸살기가 있어도 판피린 한 병 마시고 자고 나면 거뜬한 경우가 많았다. 며칠 드러누울 만큼 심하게 아픈 건 몇 년에 한 번 정도 있는 아주 드문 일이다.  


삼일 전, 오후에 컨디션이 별론데 하다가 해질 무렵부터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올게 왔구나. 내가 뭔 통뼈라고, 독감 환자 둘을 이길 재간이 있을까. 그래도 믿는 구석인 판피린 한 병과 하룻밤 숙면이면 나을 거란 믿음이 있었는데 웬걸 밤새 앓고 아침엔 더 아팠다. 쓸데없이 버티지 말고 병원부터 가라는 아내의 타박에 줄을 뭣같이 서는 동네 병원으로 향했다. 눈 예보에 노인 환자들 내원이 대폭 줄어서 줄은 서지 않았지만 검사결과는 A형 독감이었다. 실손 처리가 된다는 말에 맞는데 10분 걸린다는 작은 독감 링거도 맞고 약까지 받았더니 뭣이 20만 원 가까이 나온다. 저녁에 아내에게 이거 과잉 진료 아닌가 했더니, 자기는 센 약으로 빨리 낫는 게 오래 아픈 것보다 훨씬 낫다고 의사 역성을 든다. 독한 약에 내성 생기는 것만 걱정했는데, 하긴 그 말도 맞다. 시간이 돈이다.


어제저녁엔 가출했던 입맛이 돌아왔다. 회복의 신호다. 남들은 기침을 한다던데 나는 독감이 코로 왔다. 콧물이 줄줄. 티슈를 끼고 살았다. 코가 막히면 맛을 모른다. 후각과 미각은 세트다. 이틀 동안 물과 믹스 커피, 생강차만 마시면서도 약은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처방 약에는 위장 보호제가 들어 있어서 식도염 재발 걱정은 안 했다. 퇴근길에 후라이드 치킨 두 마리와 간장 치킨 한 마리를 사서 배 터지게 먹었다.  


독감 나흘 째인 오늘 아침에는 알람 없이도 여섯 시 반에 눈을 떴다.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콧물도 말랐다. 코로 숨을 쉬는 게 이렇게 좋구나 생각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출근을 해서도 열 시쯤 까지는 몸 눈치를 살폈지만 별다른 기색은 없었다. 며칠 만에 운동화를 갈아 신고 산책을 나섰다. 주택가를 벗어나 비탈진 산길을 오르는데 찬 공기가 알싸하게 코로 밀려들었다. 빈속에 생맥주 한 모금을 마시면 식도와 위장의 위치를 체감하는 것처럼 차가운 공기가 기도를 통해 폐로 들어가는 게 느껴지는 듯했다. 며칠 미뤘던 업무와 만들던 서류, 미팅 준비를 생각했다. 사실 아픈 동안 제일 힘들었던 건 마음의 힘이 빠지는 거였다. 온통 비관적이었다. 통제하지 못하는 무의식이 힘을 발휘하는 새벽처럼 몸이 무너지니 마음도 약해지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일이 힘들었다.

언덕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기면서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무기력과 비관에서 빠져나왔음을 느꼈다. 일은 해볼 만한 대상으로 다시 축소돼 보였고 세상은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왔다.

긍정, 긍정.

역시 사운드 바디, 사운드 마인드다.   


최근 몇 년 새 크게 아픈 적이 없었다. 패턴상 언제가 됐던 한 번 드러누울 때가 되지 않았을까. 연초부터 호되게 아팠고 빨리 빠져나왔으니 숙제 한셈 쳐야겠다. 어쩌면 올 한 해 있을지도 모를 온갖 나쁜 일들을 모아 모아서 독감 한 번으로 퉁쳤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뭘 자꾸 의미를 부여하나 싶고, 뭔가 작위적인 느낌도 들지만 그리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다.

이왕 아팠는 걸 뭐, 어쩌라고.


오늘은 1월 첫날 한 편 쓰고 못 쓴 글도 좀 쓰고 며칠 밀린 일도 좀 해야겠다.

흐랏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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