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앞산 산책을 가기 전에 잔돈을 챙겼는지 몇 번씩 확인한다. 내려오는 길에 단골 명진슈퍼에 들러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다. 주인아줌마 입원 전에는 간혹 잔돈을 깜빡해도 외상이 됐기에 두 번, 세 번씩 확인하지는 않았었다.
'사장님은 언제 퇴원하신대요?'
출근길에 들른 명진에서 익숙한 동작으로 담배 한 갑을 빼들고 레쓰비 캔커피를 냉장고에서 꺼내며 물었다.
가게를 대신 봐주고 있는 슈퍼 뒷집 60대 아저씨는 '한 3 주?'라고 답했다.
오전조, 오후조로 나눠서 슈퍼에 살다시피 하는 터줏대감 동네 할매들하고만 있어서 말상대가 궁했던 참이었던지 설명이 주렁주렁 늘어졌다.
정리하자면, 탈이 났던 허리와 발목은 수술 없이 도수치료와 재활로 갈음하기로 했다는 말.
'칼 안대서 다행입니다.'
붙들리면 하염없겠다 싶어 말을 흘리며 빠르게 가게 밖으로 나와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떨어뜨렸다.
담뱃불을 붙이며 힐끗 돌아본 명진슈퍼는 평소와 달라진 게 없다. 아줌마만 없을 뿐, 모든 것은 제자리에 놓여있었고 제대로 쌓여있었다.
그런데 뭐가 다른 걸까. 서너 평 좁은 공간이 휑해 보였다. 어릴 적 학교 파하고 일찍 집에 왔을 때 아무도 없으면 적막한 마루가 유독 넓어 보였던 것처럼.
명진에서는 담배, 커피 그리고 가끔 사 먹는 라면이 내 주된 볼일이다.
출출한 오후에 슬슬 걸어가서 진열대에 있는 라면 중 땡기는 놈으로 골라 건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끓여 팔았다. 콩나물, 가래떡, 양파... 가게 냉장고 사정에 따라 들어가기도 하고 생략되기도 하는 재료들.
아줌마가 뭐라도 더 넣은 날은 꼭 말을 덧붙였다.
떡이 들어갔어도 그냥 라면값만 받는다거나 콩나물을 넣어서 국물이 시원할 거라는 말을 보탰다. 파와 계란은 항상 넣어주고 신김치도 떨어지는 법이 없다.
주인아줌마와의 대화랬자 동네 '큰일(?)' 아니면 날씨 같은 스몰토크가 전부지만 혼자 먹는 동안 심심치는 않았다.
차가운 레쓰비 캔을 따며 생각했다.
왜 허할까.
무엇이 허전할까.
지난달에 오래 거래하던 고물상이 문을 닫았다. 여러 해 동안, 월 마감을 하고 나면 파지를 내가는 집이다. 노인 부부가 운영하던 곳인데, 땅 주인이 비워달라고 했단다.
그 동네에 신축 아파트가 대거 들어서고, 입주가 시작되면서 작은 건물이라도 세울 모양이라고 했다.
'이사 안 가시고요?'
옮겨서라도 계속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물었지만 영감님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주머니 관절도 안 좋고, 코로나부터 이어지는 불경기에 당신도 지쳤다고 했다. 마지막 거래를 하던 날, 아주머니가 타주는 믹스 커피를 받아 말없이 마셨다.
'인자 명절 때 김 선물은 어데서 받지요... 아무튼 두 분 다 건강하시이소.' 영감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내밀었고 나는 두 손으로 맞잡았다.
비쩍 마른 손의 굵은 뼈마디가 느껴졌다. 손을 놓고서도 몇 번이나 목례를 했다. 이제 두 분을 다시 볼 일은 없을게다.
작년에도 오랜 거래처 두 군데가 없어졌다. 열댓 살 많은 사장님이 하던 재단소 한 곳은 아예 문을 닫았고, 인쇄와 코팅을 하던 업체는 당분간 휴업을 한다고 했지만 띠동갑 형님의 건강 상태로 보아 폐업이나 다름없었다.
정든 사람들이, 익숙한 업체들이 사라지고 있다.
코로나 기간에도 많은 회사들이 없어졌는데.
일이 없어서, 나이가 많아서, 건강을 잃어서, 이자 부담이 커져서.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뿌리는 같아 보인다.
한 시대가, 한 세대가 저무는 것을 목격하는냥 마음이 허하다. 머지않아 사라질 나와 내 회사, 내 시대의 예고편을 보는 것 같이 느껴진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슈퍼 앞 평상의 두부와 콩나물을 정리하다가도, 가게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밝게 인사를 건네던 명진슈퍼 아줌마의 건강한 목소리를 빨리 다시 들었으면 좋겠다.
'오늘 덥지예?'
'그러네예, 벌써 이래가 우짭니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