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업체 사장이 알은체를 했다.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회사 상황은 괜찮은가 보구나, 나도 모르게 내 목소리도 한 톤 올라갔다. 질 수 없다. 묘한 경쟁심, 나도 괜찮아 라는 싸인.
폰화면에 내 이름이 떴나 보다.
근 10년 만의 통화인데 내 번호가 저장돼 있었구나. 하긴, 나도 내 폰 리스트 번호로 전화를 했으니.
한 달쯤 전의 일이다.
오랫동안 포기하고 살았던 자체 브랜드 사업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기존의 패턴은 허물어지고, 아직 종착지는 흐릿하지만 급하게 달라지고 있는 소비 시장 때문이다. 작년 가을부터 고민을 했으나 겨우 콘셉트를 잡은 건 이번 봄 무렵이다. 이대로 있다간 고사(枯死)할 것 같은 염려가 어깨에 올라탄 살찐 호랑이처럼 짓눌렀다. 준비를 하면서도 매일 불안과 희망 사이를 오가느라 숨이 차다.
기획을 하다 보니 이 업체의 가공이 꼭 필요한 상품이 생겼다.너무 오래 거래가 없었고, 그사이 작은 업체들이 대거 사라진 코로나 기간도 있어서 전화를 하면서도 불안했다. 이 회사가 없으면 상품 몇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 내가 알기론 대체할 업체가 없다. 혹시 새로 생겼다 해도 찾기도쉽지않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근자에 '이제 안 해요', '저희 문 닫았어요' 같은 말도 너무 많이 들었다. 다행히 걱정은 기우였고 다음 서울 출장길에 방문하기로 하고 통화를 마쳤다.
사실, 굳이 가야 할 이유는 없다. 예전 방식대로 물건을 보내고 업체에서 작업을 해서 다시 우리 회사로 보내주면 한 사이클이 끝나는 일이다.
물어보니 단가도 옛날 그대로, 계좌도 그대로, 사업자 번호도 그대로, 거래 방식도 그대로, 뭐 하나 바뀐 게 없다.
그제 서울 출장의 메인 일정을 일단락 짓고 전화를 걸었다. 예전 주소를 대니 명보 아트홀 앞으로 이전을 했단다.명보 사거리에 도착했다는 내 전화에 골목입구까지 마중을 나왔다. 말로 설명 들어서는 찾기 힘든 곳임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골목을 굽이 굽이돌아 도착한 업체는 예전의 반 정도 크기로 작아져 있었고 기계 숫자도 줄어있었다. 코로나는 공평하다.
작업할 물건들이 좁은 공간에 제법 쌓여있었다. 이러면 묻지 않아도 형편은 짐작할 수 있다. '이거는 어느 업체 작업이냐', '요즘 누구는 잘 계시냐', 같은 대화를 주고받고 준비되는 대로 화물 띄우겠다는 말로 짧은 만남을 마무리했다.
골목길을 되짚어 돌아 나오며 사진을 찍었다. 서울 강북엔 아직도 이런 골목들이 많이 남아있고, 요즘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골목들이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까는 다른 문제다. 머지않아 여기도 개발의 바람이 가차 없이 불 것이다.
내 회사도, 저 업체도, 이 골목 풍경처럼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업계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소비자와 시장은 크게 변하고 있었고, 코로나의 압박이 변화의 속도를 최대치로 가속시켰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