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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SJ Jul 05. 2020

스페인 어학연수, 1년과 2년 사이

외계어 같던 스페인어와 조금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


발렌시아에서의 1년간의 생활을 정리하고 스페인 북부 도시 산세바스티안으로 이사했다. 이사업체를 써야 하나(비싸다), 택배로 짐을 부쳐야 하나(이 또한 비싸다) 고민을 하다가 결국 캐리어와 이민가방을 이용해서 직접 옮겼다. 짐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배는 많아서 두 번에 거쳐 옮겨야 했지만 말이다





라 콘차 바닷가 옆 광장에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주제로 한 작은 전시회가 진행 중이었다. 스페인 북부 도시 게르니카에서 일어난 비극을 주제로 한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는 마드리드 소피아 미술관에 있는데, 이 곳에서는 이 작품이 스페인에 오기까지 어떤 여정을 거쳤는지 알려주는 전시였다. 당시 스페인은 독재자 프랑코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걸작 '게르니카'는 쉽게 스페인 땅을 밟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시는 스페인어(castellano)와 바스크어(euskera)로 안내되어 있었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은 그 고유와 문화와 언어를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어, 학교에서도 바스크어로 수업이 대개 진행되며 공관서 직원들도 두 언어를 네이티브로 말한다. 안내문구가 3가지 이상 제공된다면 영어 안내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스페인어와 바스크어. 이렇게 두 가지로 제공되는 게 기본이다


발렌시아에서 미술관을 돌아다닐 때는 영어 안내문구를 보면서 스페인어 안내서를 읽고는 했는데, 여기서는 내용을 알고 싶으면 단어를 열심히 찾아가며 스페인어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바스크어는 스페인어와 단어도 어순도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읽을 수 있는 단어는 제로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10평 채 안 되는 전시공간을 다 둘러보는 데 3시간 정도가 걸렸다. 이마저도 100% 내용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고 50-60% 정도, 대략의 흐름과 주요 내용을 파악한 데 걸린 시간이었다




한글로 된 책을 읽으며 놀란 마음을 다스린다




1년 3개월, 작은 도전




2020년,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상이 모두 멈춰버렸지만 2019년에는 스페인 북부에 한국 방송 촬영 팀이 몇 차례 왔었다. 한 번은 서브로 통역일을 도와줄 수 있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통역을 할 장소는 톨로사(Tolosa) 재래시장. 평소 장 볼 때는 스페인어에 전혀 문제가 없었기에 일을 받아들였다. 톨로사는 아직 가보지 못한 도시라 촬영 일주일 전에 미리 방문해서 시장에 가는 길도, 어떤 재료를 파는지도 미리 파악해두었다


덕분에 톨로사에서의 작업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는데, 예정에 없던 장소에서의 촬영이 추가된 것. (역시 촬영은 하다 보면 계속 일정이 바뀌고, 열에 아홉은 시간이 지연된다) 김치를 활용한 현지인들의 요리대결 현장이었는데, 메인 통역은 물론 통역사님이 진행했지만 중간중간 현지인들의 역사 설명을 전달하고 인터뷰를 진행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아직 내 스페인어 실력이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은 날이었다




촬영팀과 마지막 저녁식사, 부대찌개






통역 날의 좌절도 있고, 산세바스티안에 오고서 스페인어로 누군가와 떠들 기회가 현저히 적어지면서 내 스페인어 실력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산세바스티안으로 온 지 3달째. 그 3달 동안 내 스페인어는 전혀 늘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말하기 실력은 줄은 것처럼 느껴졌다)


산세바스티안으로 이사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9개월 전, 저가항공 특가 프로모션으로 저렴하게 끊은 항공권을 그냥 버리기엔 아까워 발렌시아로 내려간 뒤 비고행 비행기에 올랐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루트였다) 그리고 우연히 발렌시아에서 같이 살았던 룸메이트와 마주쳤다. Madre Mia!!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새로운 생활은 어떤지, 서로의 근황을 묻고 떠드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수업 외에 (아니 수업시간을 포함하더라도) 이렇게 스페인어로 길게, 신나게 떠드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 신났다. 한 시간 넘게 무리 없이 스페인어로 대화를 나눈 나 자신이 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반년 전에는 룸메이트들과 10분 떠들기도 힘들었는데 말이다




델레 시험 준비 시작




신나게 8월을 즐기고, 9월이 됐다. 아직 여름날같이 덥지만 이제는 도서관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공부를 할 때다. 스페인어 공인 시험인 델레 시험까지 4주밖에 남지 않은 것. 2-3달 전에는 공부를 시작해야지~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 시험까지는 한 달 채 남지 않았고,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렇게 9월은 열심히 스페인어 공부를 하며 보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점심 도시락을 쌌고, 오전 내내 수업을 하고 나면 도시락을 빨리 먹고 계속 공부를 이어갔다. 저녁때 집에 돌아가 저녁밥을 먹고 나면 더 책을 보고 싶지는 않아 그냥 침대에 누워버렸다. '아, 아직 공부 더 해야 하는데.... 아직 부족한데...' 이런 마음이 있어 선생님이 "공부 많이 했냐"며 인사차 물어볼 때마다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한 번은 '나는 수능 때의 기억 때문인지 하루에 최소한 12시간은 공부해야 공부를 많이 했다고 생각된다'라고 대답했더니 선생님은 깜짝 놀랐다. 지금 나 정도 공부하는 것도 자기가 보기에는 충분히 많이 하는 거라며. 역시 우리는 시험의 민족인가 보다-


그래도 7일 중 하루는 온전히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근교에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산세바스티안 영화제에 구경 가서 '기생충'을 관람하기도 했다. (사람들 반응이 너무 좋아서 국뽕이 차올랐다)


여기서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델레 시험을 한 번은 볼 것을 추천한다. 첫 번째로, 자신의 스페인어 실력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시험공부를 하면서 부족했던 부분이 보이고 앞으로 어떤 부분에 더 집중해야 할지 파악이 확실히 된다. 세 번째로, 이 과정으로 인해 스스로 모티베이션이 된다. 시험 비용이 만만치 않다 보니 시험을 등록하고 나면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시험이다




한국을 설명하다


한국의 나이 계산법을 설명하다가 한국식 호칭, 숫자까지 설명하게 되었다
하루는 한국에 대해 한 시간 넘게 설명하기도



제법 오래 같이 수업에 있었던 빈센트와 쟈닌이 본국에 돌아가고, 11월 중순부터 나만 수업에 남아 있었다. 선생님과 1:1로 있다 보니 대화 주제도 더 자유로웠고 수다를 떨 기회도 많았다. 하루는 에스텔이 '한국에서 나이 계산하는 방법을 몇 번 듣기는 했는데 아직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며 설명을 요청했다. -외국인들이 종종 궁금해하고 놀라는 주제다-


"한국에서는 서로 통성명을 하고 나면 나이부터 물어봐. 왜냐면 나이에 따라 말하는 방식이나 호칭이 달라지거든" 호칭에 대해서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며 에스텔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나는 에스텔을 학생 책상에 앉히고 칠판 앞에 서서 열심히 설명을 했다. 어떤 날은 (그녀가 관심이 아주 많던) K-beauty를 설명하기도, 어떤 날은 한국의 특징과 역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델레 시험을 치른 이후로 한동안 변화가 없던 내 스페인어가 조금 성장한 게 느껴졌다.




하지만 문제는 어휘




하지만 어학연수 1년 정도부터 지금까지 나의 발목을 계속 붙잡고 있는 '어휘 부족'은 여전히 나를 놔주고 있지 않다. 어쩌면 이 문제는 여기에 사는 이상 계속 가지고 갈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몇 번을 적어도 계속 까먹는 단어는 손등 위에 적는다. 집에 가는 길에 신호등 때문에 잠시 멈출 때마다 단어를 한 번씩 되뇌어주면 그래도 도서관 자리에 앉아 노트를 보며 외울 때보다 조금 더 많이 머리에 들어오는 듯하다



코로나, 모든 것이 멈추다




그리고 지난 3월, 스페인이 멈췄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럽에도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슈퍼마켓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어학원은 갑작스레 온라인 수업을 준비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집에 갇혀 버렸다. 스페인 생활 1년 하고 거의 9개월이 된 상황이었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코로나가 퍼지던 1월부터 주변을 조심하고 다녔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레스토랑이나 바, 좁은 길은 물론 도서관에도 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은지 이미 오래된 상황이었다. 어학원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곧장 와 종일 집에만 있었다. 내 스페인어 실력은 다시 성장을 멈춘 듯했다




   


C1(고급) 레벨 교재 자체도 쉽지 않은데 수업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니 3시간 반 수업을 끝나고 나면 그대로 넉다운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점심밥을 먹고, 수업 때 이해 못 한 부분을 다시 들여다보고 숙제를 하고 나면 어느덧 저녁 먹을 시간. 집안에 하루 종일 갇힌 상황이니 더 스트레스에의 반응이 예민해졌다





이제 스페인 생활 만 2년 하고 한 달이 꽉 찼다. 여전히 스페인어는 내게 어렵다. 하지만 이제 예전처럼 스페인어가 외계어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영어보다 이제 스페인어가 더 편하고 쉽다. 새로운 도약, 성장을 위해 이제 새로운 도전을 또 준비해야 할 때라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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