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정확히 5시 30분에 눈이 떠졌다.
일찍 일어나고 싶으면 일찍 자면 된다. (이 단순한 원리를 지키기가 참 힘들다.)
방에 커튼이 없으면 된다. (해가 너무 일찍 떠서 5시 30분인데도 대낮인 줄 알았다.)
30분쯤 누워서 뒹굴뒹굴하며 핸드폰 보다가(일어날까 말까 고민) 일어나서 모닝페이지를 썼다. (매일 쓰면 좋으련만 5월 28일에 쓰고 안 썼네.)
모닝페이지는 거창한 건 아니다. 그냥 머리에 떠오르는 데로 아무 말이나 3페이지 쓰면 된다. 잡념, 망상, 감정의 배수로라 생각하면 된다. 막 쓰면 된다.
요새 주로 생각하고 있는 건 '나는 왜 책을 쓰려고 기웃거리는가?'다.
책을 사서 읽는 사람보다 책을 쓰려는 사람이 많다는 요즈음이다.
읽히지도 않을 것을 써 내면 종이 낭비 아닐까? 내 잡스러운 글들이 어째어째 책으로 나온들(이것부터 주제넘은 생각일지도... 누가 내준다나?) 온갖 말과 글들로 웅성웅성 시끄러운 세상에 뭘 더 보탠다는 게 못마땅했다.
뭘 쓰기도 전에 걱정을 하냐 싶겠지만 이건 내 생애 통틀어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내가 하고 싶어서(보통 여기서 지레 포기) 진짜 해보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다.
책을 쓰는 행위 이전의 그 행위의 타당성부터 스스로 납득이 되어야 했다. 존재의 이유부터 치열하게 고민해서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싶었다.
자꾸만 쓰고 싶어서 쓰고 싶은 이유를 꼭 찾아야 했다.
왜?
왜?
왜?
오늘 쓴 모닝페이지에서 얼핏 답을 찾았다.
지구처럼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고 싶다.
항성: 핵융합 반응을 통해서 스스로 빛을 내는 고온의 천체
행성: 항성 주위를 도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천체
나는 그동안 행성처럼 살았다.
부모의 양육, 선생님의 교육, 사회 규범, 상식이라는 항성 주위를 이탈하지 않고 돌고 있었다. 아니 돌려고 안감힘을 썼다. 그 덕분에 나는 직장을 얻었고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 집이 있고 내 자동자가 있고 내 직장이 있는 삶. 행성으로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 안전한 삶. 감사하게도 모두 이루었다. 내가 행성으로 항성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가열하게 돈 덕분이었다.
그거면 되어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불편했다. 답답했다. 불만족스러웠다. 짜증 났다.
자꾸만 머리에 꽃을 꽂고 몸 어디도 불편하게 하지 않는 풍성한 원피스를 입고 자유롭게 이곳저곳 다니는 여자의 이미지(미친 여자 아님)가 떠올랐다. 그 여자가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궤도를 이탈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래서 두려웠던 것 같다.
평생을 돌던 그 궤도를 이탈하면 영영 이 우주에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아니었을까?
나에게 책을 쓴다는 것은 그 궤도의 이탈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두려웠나? 내가 뭐라고? 뭘 쓴다고 이러면서 책 쓰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부정하려고 했었다.)
책을 낸 사람들은 말한다. 책 한 권 낸다고 뭐가 확 바뀌는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 풍족해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안티들의 공격을 받아 괴로워지기도 한다고.
맞다.
외적인 변화(경제적인 이득, 명성)를 원치 않는다.
이미 충분하다. 내 수준에서는.
항성처럼 자가발전을 시작하고 싶은 것이다. 그동안 행성으로서 궤도를 돌면서 경험했던 것, 알게 된 것, 느낀 것으로 나만의 궤도를 만들고 싶다.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별(항성)이 있다. 엄청 크고 빛나는 별들만 해도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행성의 궤도를 이탈해서 엄청 크고 빛나는 별이 되지 못하면 어쩌나 두려웠던 것 같다.
깨달았다.
그냥 작고 볼품없는 데다가 희미한 빛을 내더라도 나의 궤도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나는 빛나고 싶다.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
내 말을 하고 내 글을 쓰고 싶다.
삶의 반을 착실하게 궤도를 따라 살았으니 이제는 나만의 궤도를 만들고 아기자기 스스로 살아보겠다.
이게 내가 책을 쓰고 싶은, 책을 써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