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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만소리 Mar 02. 2020

나쁜 일은 항상 몰려온다.

라오쓰에 나와쓰 2화. 여행사 새옹지마


"배가 끊겼다고?!"


 아침 7시에 오기로 한 미니밴이 9시에 꾸역꾸역 올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즉흥 여행의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는 걸 말이다. 2시간이나 늦어버린 미니밴 기사가 가벼운 톤으로 '쏘리~'를 외칠 때, 잠깐! 짚고 넘어가자!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 모든 불안한 징조들을 눈 감아버리니 결국 이런 일이 생겨버렸다. 뭐가 잘못됐을까. 그래, 자정이 넘는 시간에 술에 쩔어서 마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예약한 게 문제였을지도 몰라.


술 먹다 말고 이곳에 오기로 결정한 것부터가 잘못이었을지도 몰라.



라오스에 나와쓰! 2화. 글/키만소리(김한솔이)
"나쁜 일은 항상 몰려온다."


"내일 메콩강 마을 므앙러이에 가자. why not?"


어젯밤. 술도 달큰하게 올라왔겠다, 새로 사귄 친구들도 재밌겠다 토니의 제안을 받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토니는 아무 호스텔 문을 두들겼다. 문 틈 사이로 이미 깨끗하게 비어진 라오 비어 몇 병과 마작 패를 든 남자들이 보였다. 그중 사장으로 보이는 아저씨와 토니가 몇 마디 나누더니 우리에게서 미니밴 비용을 걷어갔다. 불안 불안했지만 다들 급 결정된 즉흥 여행에 다소 격양된 상태라 거리낌 없이 돈을 냈다. 그게 문제였다.


 토니는 행동파였지만 동시에 낭만주의자 이기도 했다. 약속된 시간보다 픽업이 늦었다고 해서 하루의 기분을 소비하지 않는 여행자였다. 그래. 이해한다. 세 달 전에 예약한 항공권도 뿅 하고 없어지는 마당에 두어 시간이 대수랴. 여행하면서 티켓에 적힌 숫자 하나하나에 신경 쓰다 보면 신경쇠약에 걸릴 확률이 높으니까. 특히 동남아는 더더욱.


 '원래 즉흥 여행이 의도하지 않는 대로 되는 게 묘미잖아.'



아침 7시에 오기로 한 기사가 언제 올지 몰라 허겁지겁 먹었던 그 날의 아침. 이럴 줄 알았으면 천천히 먹는 건데.


 그러나 그 묘미는 너무 빨리 찾아왔다. 더구나 불행한 쪽으로. 미니 밴 기사는 우리를 버스 터미널로 데려다주고 아무런 말도 없이 홀랑 자리를 떠나버렸다. 우리와 토니를 포함한 8명은 분명 농키아우 선착장까지 가는 비용을 지불했는데, 도착 곳은 허름하고 작은 버스 터미널이었다. 여길 오려고 3시간을 쓴 거야? 더구나 농키아우 까지 가는 버스를 타려면 티켓을 또 구입하라고? 티켓 사도 1시간은 넘게 기다려야 한다고? 아침부터 날린 시간과 돈. 토니를 철석같이 믿고 안일했던 마음. 나 자신에 대한 멍청함이 몰려왔다. 그중 단연 최고로 짜증 나는 건 사기당했다는 패배감이었다.



버스회사에서는 예약받은 내용이 없다며 우리에게 티켓 값을 요구했다.


 우리는 호스텔에 전화를 걸어 이 사태를 바로잡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도 호스텔 이름도 번호도 모른다. 심지어 예약한 토니까지. 기억나는 건 술에 취해 들떴던 마음뿐이었다.


"구글로 호스텔 이름을 찾아보자. 누구 데이터 되는 사람?"

 "......."


 8명 중 현지 데이터 유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적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양하지만 참 끼리끼리 잘 모였구나. 그래, 우리 같은 애들이 데이터 같은 걸 구매했다면 이곳에 버려져 있지도 않았을 거야. 데이터 유심을 가지고 있는 다른 여행자의 도움으로 호스텔 이름을 검색했고, 전화번호를 찾았다. 1시간의 실랑이 끝에 우리는 에어컨도 없고 비포장 도로를 달리다가 타이어가 퍼져도 이상할 거 하나 없는 버스에 몸을 싣을 수 있었다. 승리자 없는 비참한 승리였다. 정오가 넘어가자 라오스의 무더위가 푹푹 찌기 시작했다. 출발도 하기 전에 기운이 쏙 빠져버렸다.


앞자리 보조석까지 야무지게 사람을 채워서 출발한 고물 마을버스

 

쿵짝쿵짝! 마을버스 기사의 시동소리와 함께 태국에서 건너온 뽕짝들이 울려 퍼졌다. 덜컹덜컹! 이번엔 비포장 도로의 굴곡 바운스가 의자 쿠션을 너머 나의 엉덩이로 전해졌다. 잠으로 빠진 기운 좀 보충하려고 했는데 글렀다.


쿵짝쿵짝! 뽕짝과 함께 140km를 달렸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고물 마을버스는 아주 작은 마을들을 여럿 거치며 140km를 달렸다. 정해진 정류장은 따로 없었다. 길에서 만나는 라오스 주민들을 수시로 태우기도 했고, 내려달라고 하면 곧장 섰다. 옷 보따리, 음식, 닭, 과일 등 다양한 짐들이 들락날락했다. 시장에 도착하면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도 내려서 배를 채울 수 있는 바나나와 과자 따위를 사거나 화장실에 갔다. 덕분에 고물 버스 여행은 야금야금 시간을 갉아먹었다. 또 한 번의 즉흥여행 묘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나 불행한 쪽으로.


 그 불행을 먼저 감지한 것은 방학을 맞아 혼자 여행 온 작은 거인, '옌'이었다.


"언니, 아무래도 우리 배 끊길 것 같아요."

"아직 3시밖에 안됐는데?"

"마지막 배가 4시래요."


마지막 배 시간을 알아도 안 풀리는 날은 뭘 해도 안 풀린다.


  토니는 이 사실을 모르는지, 아니면 상관없는지 헤드셋을 끼고 낭만적으로 잠들어 있었다. 일정이 정해진 휴학생 옌과 민 그리고 휴가 날짜가 얼마 안 남은 일본인 분타가 발이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터미널에 도착하자 시계는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느낌이 애매하고 쎄했다. 그때 여행자를 실어 나르는 트럭이 한 대 다가왔다.



"마지막 배 한 대 남았어. 지금 가면 탈 수 있을 거야."



이대로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다급해진 우리들은 서둘러 트럭에 배낭을 옮겨 담고 트럭 기사와 함께 선착장으로 향했다. 점점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메콩강과 라오스의 열대우림 그리고 그 위를 감싸며 한가롭게 노니는 구름 떼가 가까워졌다. 비록 시작은 엉망이었지만, 결국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만 한다면 오늘 하루가 나쁘게 기억되지 않을 것 같았다. 여행의 과정이란 원래 미화되기 마련이고, 힘든 일도 도착한 숙소 침대에 누우면 '그랬었지~' 에피소드가 되는 법이니까.


부아아앙!! 끽!! 잘 나가던 트럭이 갑자기 작은 마을 샛길로 빠졌다. 아하. 배 시간에 늦지 않게 데려다주려고 현지인만 아는 길을 가시는 구나.라고 빌었지만 늘 슬픈 예감을 틀린 적이 없지. 트럭은 선착장이 아닌 이층으로 된 숙소 앞에 터프하게 주차를 했다. 마지막 배도 거짓말. 선착장으로 데려다주겠다는 말도 거짓말.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 트럭 기사는 모든 호객꾼들이 영업을 접을 때도,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영업을 뛰는 진정한 영업왕이었던 것이다.


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빡치는 사기 그리고 귀엽게 봐줄 수 있는 사기.


 나쁜 일은 언제나 몰려온다. 그러나 사람들이 여행에 빠지는 이유는  나쁜 일이 좋은 패로 뒤집히기 때문일 것이다. 루미큐브의 조커처럼, 고스톱의 쓰리피처럼 여행에도 그런 패가 있다. 마지막 배를 놓치는 패는 우리를 오지로 데려다 놓았고, 우리에게 호탕한 사기를 친 아저씨의 주머니를 털어 맥주를 마시게 됐다. 그리고 그 맥주로 인해 목적지가 바뀌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계속)





키만과 효밥. 2년간 부부 세계 여행 기록을 <여보야, 배낭 단디 메라> 웹툰으로 옮기다가 작가가 너무 게으른 탓에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림보다 글이 빠를 것 같아서 여행 하이라이트를 뽑아 연재하기로 했다. 그 첫 번째 여행 이야기는 라오스 메콩강 북쪽 오지 마을에서 일어난 <라오스에 나와쓰!>다.  





키만소리 (김한솔이)

2년간 남편과 세계 여행을 하다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곳 출판 스튜디오 <쓰는 하루>를 만들었다.

여행자에서 이제는 작가와 글방 에디터, 출판사 대표를 맡고 있다.

제3회 브런치 출간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엄마야, 배낭 단디 메라」를 출간했다.

세계 여행하면서 받은 엄마의 메일을 엮어 「55년생 우리 엄마 현자씨」를 출간했다.

다수의 작품을 그리고 쓰며 활발히 연재 중이다.

인스타그램 @ki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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