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을 외면해온 전통 금융사
오랫동안 전통 은행들은 정부의 보호와 규제 울타리 안에서 안일한 성장을 누려왔다. 예금과 대출이라는 단순한 구조 속에서 막대한 매출과 이익을 거두었고, 굳이 새로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리스크를 짊어지기보다 안정성을 택했고, 혁신은 뒤따르는 선택 사항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스테이블코인의 부상은 은행이 안주하던 그 기반을 흔들고 있으며, 각국의 규제 완화 움직임은 전통 금융사들의 발등에 불을 붙이고 있다.
최근 미국 은행협회(ABA), 은행정책연구소(BPI), 소비자은행연합(CBA) 등 주요 금융단체는 의회를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스테이블코인 소유주에게 이자나 보상을 지급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2025년 7월 통과된 지니어스법(Genius Act)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자가 이자 지급을 금지하도록 규정했다. 은행이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해도 이자를 붙일 수 없다는 뜻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암호화폐 거래소는 법망에서 빠져 있어, 서클이나 테더 같은 발행사의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한 고객에게 간접적인 보상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다.
은행의 우려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운동장이 기울었다”는 것이다. 은행은 규제에 묶여 고객에게 이자를 줄 수 없는데, 거래소는 보상을 통해 더 많은 고객을 끌어들이는 구조다. 이대로 가면 은행 예금 약 6조 6,000억 달러(한화 9,174조 원)가 스테이블코인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현실화된다.
스테이블코인 자체가 법적으로 이자를 지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회적 방식은 존재한다. 예를 들어, 거래소나 디파이(DeFi) 플랫폼이 고객의 스테이블코인을 예치 받아 운용하고, 그 수익 일부를 사용자에게 보상 형태로 제공한다. 사용자는 “예치 보상” 혹은 “리워드”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이자를 받는 셈이다.
이 구조는 은행의 예금-대출 메커니즘과 닮아 있지만, 더 빠르고 투명하며 탈중앙화된 방식으로 이뤄진다. 거래 기록은 블록체인에 남고, 정산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예금보다 더 높은 수익, 더 빠른 접근성을 갖춘 대안이 열리는 것이다.
은행들은 정부와 규제기관을 상대로 “이대로 가면 예금 이탈이 커져 대출 여력이 줄고, 금리 상승과 경기 위축으로 이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자신들이 오랫동안 누려온 특권적 지위가 흔들리고 있음을 인정하는 발언이다.
과거 은행은 정부 보증, 예금자 보호 제도,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 덕에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하지만 혁신은 더뎠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보다는 기존 틀을 유지하는 데 안주했다. 스테이블코인은 이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더 이상 “정부 보호 아래 혁신 없는 성장”은 불가능하다.
은행들의 로비는 일시적으로 규제 논의를 지연시킬 수 있다. 그러나 금융 시장의 대세를 바꾸기는 어렵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전 세계 4천억 달러 규모를 넘어섰고, 향후 5년 내 4조 달러 시장으로 커질 전망이다.
게다가 고객은 더 나은 서비스, 더 빠른 결제, 더 높은 수익을 원한다. 은행이 이를 제공하지 못하면, 고객은 자연스럽게 스테이블코인과 디지털 자산 생태계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은행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혁신을 받아들이거나, 시장에서 밀려나거나.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은 전통 금융 산업에 전례 없는 위기를 안겨주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은행이 규제 준수, 신뢰, 자본력을 무기로 자체 스테이블코인 발행과 수탁 서비스, 토큰화 자산 관리에 뛰어든다면 시장 주도권을 되찾을 수도 있다.
문제는 속도다. 이미 판은 벌어졌고, 고객의 선택은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안일함에 머물던 은행에게 스테이블코인은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이제 은행업의 생존과 혁신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