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한마디로 오묘하다. 마치 시간이 지날수록 번져가는 잉크로 작성한 메모 같다고 해야 할까? 최근 남겨진 기억은 이렇게 남기는 문장들만큼이나 분명하게 그 존재가 느껴진다.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지는 장면이나 맡았던 냄새, 당시의 감정 같은 것을 함께 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래된 기억들은 어떨까? 때로는 오래된 기억과 연관된 다른 기억이 서투르게 휘갈긴 메모처럼 덧붙여지기도 할 것이고, 그로 인해 처음에 품었던 감정이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결론으로 치닫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기억과 함께 기억이 유지되고 존재하는 경우도 분명 있지만 대다수의 기억들은 시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흐릿해지곤 한다. 그 기억과 함께했던 생각이나 감정도, 장면도, 어쩌면 그런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마저도. 그렇게 무작정 기억으로 향하는 끈을 놓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대개의 기억은 잉크 범벅이 되어버린 메모처럼 남아있게 된다. 기억과 함께 품고 있던 강렬했던 감정이 희미해지고, 그 순간을 함께한 대상이나 주변의 사물들이 있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번져버린 잉크로 인해 알아볼 수 없게 되고 마는 느낌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시 현장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아내려는 고고학자처럼 굴지만, 대개는 실패한다. 그것으로 연결되는 단서는 이미 소실되어 버린 지 오래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록은 특정한 기억에 대해 보존제를 뿌리는 행위와 비슷하다. 비록 그 순간을 온전한 형태로 남겨둘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덜 변색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번져버리고 마는 머릿속의 메모를 대신해 다른 형태로 그 순간에 대한 단서들을 남기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진이나 영상, 글 같은 것들로 말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광고 카피를 아는가? 나는 이 광고 카피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 문장이야말로 기록이 가지는 본질을 잘 꿰뚫어 본 문장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면, 우리의 기억은 그 사진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사진을 볼 때마다 그 순간에 근처에 있던 누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날씨나 상황은 어땠는지, 어떤 기분이나 감정이 들었는지를 떠올리게 되는 식이다. 이처럼 기록은 기억을 붙들어 매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기록된 순간을 중심으로 기억을 더듬도록 만든다. 카피의 문장 그대로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는 꼴이다. (물론 기록은 내가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내 의지로 취사선택한 것이므로 기록이 기억의 중심에 서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기도 하다.)
기억이야말로 내가 나라는 정체성의 연속성을 담보하고, 유지하는 근간이 된다면 기억이 이토록 사라지게 두는 것은 나 자신에게 크나큰 손실이 아닐까? 이것이 내가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된 이유다. 동시에 요즘 생각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기록은 또한 시의적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억의 속성을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어쨌든 사진으로 남겼다’는 일말의 안도감으로 글로 정리하기를 미룬 순간들도 많았다. 특정한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더라도 때로는 사진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도 많다. 예를 들어 전시를 감상하면서 떠오른 감정이나 생각들은 사진 같은 형태보다는 글로 정리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신중하게 고른 단어들과 수차례 고친 문장들로 그 당시의 심상(心像)을 낱낱이 기록해야 하는 것이다. 조금만 지나면 당시 느꼈던 감상이나 여운, 생각 등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간 그렇게 놓치고만 순간들이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앞으로는 기록을 남기는 일에 좀 더 착실해져야 할 것이다.
에세이 쓰기가 내게 있어 오랜 꿈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너무 버거운 일로 느껴졌던 건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순간을 기록으로 꾸준히 남기기보다는 우선 해야 한다고 생각한 다른 일들로 자꾸만 뒤로 미루어왔기 때문이라고.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글 주제가 많아질수록 그것을 차근차근 써내려고 하기보다 글 목록에서 도망치고 싶은 내 자신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글 목록에 새로운 주제를 추가하는 것으로 글을 미루지 않고, 그저 하루 30분이라도 생각난 주제에 대해 글쓰기를 하려고 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기억과 기록에 대한 글이자, 앞으로 에세이를 미루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너무 많은 글감들에 치여 아무것도 써내지 못하기보다는 다만 조금이라도 꾸준히 쓰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