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년 전. 새로운 곳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고, 내가 도전적으로 감행한 인테리어의 정점에는 바로 타이포그래피가 있었다. 그렇다. 지금은 코드를 작성하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문장과 함께해온 사람이고, 잠시나마 책 만드는 일을 하였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제는 디자인과 나 사이의 거리는 한껏 엷어졌다고 해야 할 만큼 희끄무레한자취만 남아있는 수준이 되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글자를 조합하고 여백과 어우러지게 하는 일은 내게 있어 영원히 흥미로울 과제다. 이런 아름다움 작업을 알게 해 준 알렉세이 브로도비치에게 감사를. 그런 점에서 보면 벽면의 타이포그래피는 내게 있어 언젠가는 시도하게 될 일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그렇게 이사한 후로 벽면을 장식한 타이포그래피 중 하나는 아주 식상한 위로를 전하는 문구다.
"수고했어, 오늘도."
현관문을 열어 집안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글귀가 바로 이거다. 벽면에 큼지막하게 자리 잡은 이 문장은 처음 방문하는 이의 눈길을 잡아끌기에 더없이 충분하지만 어느샌가 내게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장식이 되고 말았다. 왜, 당신에게도 그런 게 있지 않은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져서 일말의 존재감마저 사라지고 만 것들.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지만 잘 알아채기 어려운 공기 같은 존재를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슴푸레 들어온 빛과 함께 찰칵하고 사진으로 남겼더랬다. 그러고 나니 드디어 글자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마치 글자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준 것처럼. 그리고 오늘 이렇게 글을 쓰라는 듯이.
새삼 이 문구를 들여다보며 지난날을 회고해봤다. 내 스스로 "수고했어"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후회 없이 산 날은 며칠이나 될 것인가. 내 오늘은 다시 살아도 똑같이 살만큼 충분했을까? 이런 위로의 말이 내게 타당한지를 마음속으로 저울질하다가 문득 하루가 저물었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나는 지금 행복한가?"를 떠올리지 않는 순간들은 행복한 것 같다. 그리고 타인에게 잘하고 있다고 인정받는 것보다 이런 위로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 내 삶을 올바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 자신이 그런 수고를 했다며 납득할 수 없었던 날도 분명하게 있었음을 고백한다. 슬럼프가 나를 옥죄어 오던 때, 나는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잘하고 있다고, 잘 해낼 거라고 말해주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모든 것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특히 지난 9년간 쌓아온 전문성이 힘을 쓰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발 밑으로는 안간힘을 쓰면서도 별 일 없이 호수 위를 고고하게 떠다니는 척하는 백조 같은 내 자신이 역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루나 이틀 정도는 모르겠지만 프로젝트 내내 나의 허술함을 다 가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모든 문제는 연쇄적이었고 연속적이었다. 잠시 멈춰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느낀 것도 바로 그때였다.
내 문제의 핵심은 새로운 업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것과 더불어 지나친 자기 계발 욕심이 부른 화였다. 그 뒤로 나는 많은 것을 접었다. 글쓰기 모임도 그만두고, 뉴스레터를 쓰겠다며 의기양양했던 마음도 잠시 접고, 인스타그램에 올리던 사진도 끊었고, 자주 만나던 지인들로부터도 나를 고립시켰다. 삶이, 정리가 필요했다. 열 가지를 시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라도 똑바로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모든 것이 뜻을 품은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는 정리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수고했어, 오늘도."
다행스럽게도 하루치 수고에 대해 위로를 건네는 이 문장이 더는 버겁지 않게 됐다. 내가 오늘 해낸 일의 가치와, 거기에 쏟아부은 열정을 알기 때문이다. 적어도 "수고"에 대해 생각할 때 내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느낌은 말끔히 사라졌다. 한 편, 그렇게 밖에 허둥댈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나 또한 위로하고 싶다. 우리는 이따금 실수해서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운명의 장난이라고 믿고 싶은 순간들 속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다음을 살아내다보면 언제고 평안한 때가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고 말이지. 이 순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누군가에게, 나의 아프고 힘겨웠던 시간에 대한 고백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당신도 그저 잠시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당신 또한 오늘도 수고했다는 말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