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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범 Feb 02. 2020

이 시국에 어쩌자고 감기에 걸렸나

B형 독감이길 바라는 아이러니

 1월의 마지막 날 아침 7시. 바싹 마른 자취방 공기를 간헐적으로 마셨다. 물을 듬뿍 적신 수건 몇 개를 방 곳곳에 걸어 뒀지만, 소용없었나 보다. 코끝은 콧물이 말아 붙은 듯 불모지처럼 변해있었다. 방 공기는 그 불모지를 건너 폐로 넘어가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비강은 이미 콧물로 점령당했다. 푸석푸석함과 축축함의 공존. 그 와중에 일부는 빈틈을 찾았는지 폐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본디 폐에 들어선 공기는 따뜻하고 습해야 했지만, 이들은 차갑고 건조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그러했다. 목구멍 상황은 더 처참했다. 가래가 끌었다. 코끝처럼 안쪽 표면이 말라있었다는 사실은 덤이었다. 제기랄, 감기에 걸렸다. 두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심한 말을 열 마디 정도 허공에 갈겼다. 변한 것은 없었다.   

    

감기다. 그것도 이 시국에. 바로 지난 일주일을 복기했다. 어디에 갔고,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먹었는지. 당최 어디서 감염됐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간 접촉자 수를 헤아렸다. 전염됐다면, 스친 사람들 중 있을테니. 침대에서 나와 다시 침대로 들어갈 때까지를 소가 여물 십듯 되감았다. 취준생의 생활 동선은 비교적 단순했다. 몇 없었다. 하루 서른명도 채 안됐다. 인심써서 거리를 걸으며 지나간 사람을 포함해도 그정도다. 감염이라는 폭력적인 단어로 일주일을 재단해대는 모습도 나름 측은했지만, 관계망이 줄었다는 사실도 참 딱했다. 스스로가 가여웠지만, 하는 수 있나. 자기 연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스로를 감싼다고 해도 변할 것은 없으니 말이다.     


이어 앗차! 싶었던 행동들이 머릿속에 스쳤다. 새벽에 달궈질 대로 달궈진 전기장판을 껐던 나를 원망했다. 아침마다 환기를 한답시고 방문을 열었던 나를 벌한다. 샤워 후 물기가 남은 상태로 방을 활보했던 나를 온 힘을 다해 네 대 정도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몸 상태를 겉핥기식으로 확인한 뒤, 곧장 약속을 파투 냈다. “나 감기에 걸렸다. 너한테 옮길 수도 있다. 상관없으면 만나도 된다.” 남자들의 카톡은 심플하다. “ㅇㅋ. 안 가겠음.” 짧은 답이 왔다. 이윽고 농담이 건너왔다. “집에 시체라도 있는 건 아니지?” 그 시체가 내가 될 수 도 있다고 전했다. 사흘 이상 연락이 없으면 보건당국에 신고해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좀비 영화 마니아인 다른 친구가 전염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악의 섞긴 조언을 건넸다. 아포칼립스적 미래를 걱정하는 친구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한다. 덕분에 나를 희생해, 인류를 퍽도 잘 구할 듯하다.      


약속은 버렸지만, 알바는 나가야 한다. 두 번째 출근이었다. 병가 카드를 쓸 순 없었다. 명분은 있었지만 후환이 두려웠다. 기침을 숨겼고, 말을 최소화했다. 콧물은 감출 방법이 없었다. 가능한 참고 참아 한 번에 풀어냈다. 최선이었다. 접촉은 피했고, 대답은 되도록 바디랭귀지로 대체했다. 대체 감기가 뭐라고. 무리 속 투명인간 신세였다.      


간혹 참을 수 없는 기침이 나올 때가 있다. 버스에서 그랬다. 집까지 10분 거리라 방심했나 보다. 버스 가장 뒷자리 창문 옆 구석에 앉았다. 코끝이 아른거리며 기침 징후가 느껴졌다. 두 손을 마스크 위로 모았다. 소리를 최소화하려 했지만 무용지물. 사람 귀는 노이즈 캔슬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엣취! 단말마는 45번 버스 뒷좌석에서 앞좌석으로 퍼져나갔다. 수십 개의 눈알들이(정말 눈알이라고 느꼈다) 각자의 감정을 담아 나를 노려봤다. 무념의 눈빛이 그중 절반이었을 거다. 다른 절반은 경멸, 그중 절반은 연민이 조금 섞인 경멸, 또 그중 절반은 연민에 혐오 두 스푼이 들어간 눈빛이었다. 찰나의 순간, 사회적으로 살인당했다. 눈빛 살인은 꽤나 강력했다.      


보건당국의 조언에 따라 주말 내내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주말엔 보건소가 열지 않는다. 디스토피아와 아포칼립스적 미래를 그린 영화 몇을 봤다. 미뤄뒀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몇 편도 몰아 봤다. 침대에 누워 무릎에 노트북을 얹은 이 몸뚱이를 꽤 단단하다고 여겼다. 이미 두 번의 베타 코로나바이러스를 이겨낸 이력이 있어서다. 반년에 한번 꼴 몸살이 나지만 잔병치레는 없었다. 되려 과음으로 누워있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 이 시국에 감기에 걸렸으니 어쩌랴. 내일 보건소에 간다. 차악의 결과를 기대한다. 내 몸이 B형 독감을 먼저 받아들였길 내심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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