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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범 Feb 16. 2020

눈 오는 날, 경복궁에 오고 싶었는데 말이야

경복궁을 거니는 주말 오전은 삼천 원으로 누릴 수 있는 사치다. 커피 한잔 값이다. 심지어 한복을 입고 입장하면 무료다. 허나 주말 아침부터 한복을 입고 궁 투어를 하기엔, 내 의지가 꽤나 사그라들었으니. 커피 한잔 값으로 사치를 부린다.


생각해보면, 입장료가 참 저렴하기도 하다. 빌어먹을 가우디 투어는 요리조리 지갑 구석구석을 빼먹었던 기억이다. 그런데, 게 중에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공원이 있다. 단, 개장 전에 둘러보고 와야 한다. 새벽에 가야 한단 이야기다. 물론 막상 어디든 들어가면 입이 떡 벌어지니 정상참작이다.


오늘은 눈이 온다. 눈 오는 경복궁이 생각났다. 취기를 짊어지고 초록색 7025번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도 환승 없이 한 번에 경복궁으로 쏜다. 버스 창 밖으로 흩날리는 눈 싸라기들을 보며 30분 정도 흔들렸다. 회색 성벽이 눈에 밟혔다. 보인다 경복궁.


눈 오는 경복궁은 한산했다. 관광객 무리도,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자취를 감췄다. 신종 바이러스에 멋쩍은 감사인사를 보낸다.

커피 한잔 값도 안 되는 입장권을 끊었다. 눈이 녹아내린 진흙탕을 닌자처럼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근정전으로 향했다.


눈 오는 경복궁은 처음이다. 언젠가 눈 쌓인 궁이 담긴 사진을 인스타그램에서 봤고, 그 모습에 반했다. 처마 사이로 걸려있는 눈들 하며, 거뭇한 기왓장 틈에 흰색 칠이 더해지니 경복궁이 감췄던 모습을 드러내는 듯 보였다. 일 년 중 몇 안 되는 순간이다.


평소 경복궁이 고즈넉했다면, 설경의 궁은 포근한 구석이 있다. 눈이 궁을 품는 모습. 설국의 궁은 따뜻하다.


눈 내리는 날, 여기를 꼭 찾고 싶었다. 혼자도 좋고 둘이면 더 신나겠지. 오늘은 딸린 사람 없이 왔다. 갈라진 마음을 부여잡고 시야를 하늘과 땅으로 갈라버린 처마 끝으로 눈을 피할 겸 향했다.

베트남 커플로 보이는 둘이 눈에 잡혔다. 대여 한복을 진흙탕에 끌며 저벅저벅 걸어 다녔다. 어쩌려고 저러나. 이들에게 경복궁은 눈 내리는 모습이 처음일까. 그들에게 바라 왔던 광경이겠지.


비행기로 다섯시간 반을 날아온 이들은 화창한 날, 우리 궁을 한복 차림으로 걷고 싶었을 수도 있다. 원치 않았던 바이러스에 하늘에서 흰 쓰레기까지 내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처마 밑 궁 죽돌이 한국인은 그들이 재수 옴 붙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않길 내심 바란다. 설국의 궁은 흔치 않은 기회다.


눈 내리는 궁 안 양지바른 자리에 앉아있으면 궁이 온전히 내 것이 된다. 혼자 가면 좋다. 같이 가면 더 좋다. 경복궁을 거니는 주말 오전은 삼천 원으로 누릴 수 있는 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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