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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CUNA Nov 14. 2015

나요, 그냥 당신 목소리가 듣고싶었소.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은 그대에게,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1.

다섯 번째 새끼손가락까지 모두 접은 후 나는 그와 이별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다섯 번째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이다.

 그와 헤어지고 내게는 손가락이 몽땅 접힌 주먹만이 남았다. 나는 슬프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동그랗게 모아 쥔 주먹에 굳이 힘을 주지도 않았다 딱 거기까지였다. COUNT.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별이었다.    

 슬프지는 않았다. 다만 누군가를 잃고도 예전만큼 허전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씁쓸하게 했다. 뒤라스의 말이 맞았다. ‘나는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것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찌르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리했다.    

 하지만 정말이지 애초부터 이렇게 헤어질 작정은 아니었다. 마주했던 순간에는 분명 그를 좋아한다고 믿었으니까. 그도 그런 것 같았으니까. 마지막일거라고도, 종종 믿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끝이 났다. 그래서 끝이 났다.


 상처 받을까봐 두려웠다기보다는, 상처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있었기에. 좋아하긴 했지만, 사랑하지는 않았기에. 그래서 끝이 났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되어버린 건 나만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영원히 너를 사랑할게”라는 맹세를 너무도 쉽게 해버린, 떠나간 나의 연인들에게도 잘못은 있다. 영원이라는 단어를 너무도 쉽게 약속해버린 그들에게도, 분명 잘못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의 범주로 밀어버린 그들.


 나의 ‘연인’들.





2.

 연애는 나이를 먹어갈 수록 더 어렵다. 다른 것들은 하면 할수록 는다는데 연애는 상대가 바뀌면 그 모든 것이 바뀐다. 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

 심지어 분명 다른 연애였는데, 비슷한 상처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숨 막힐 일이다. 더구나 살아가다보면 연애 말고도 중요한 것들이 꽤 많아진다. 먹어야하고, 입어야하며, 그 혹은 그녀가 아닌 사람들에게 사랑도 받아야한다. 데드라인을 정해놓고 하는 일이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끝을 눈치 채 버린 사람들에게 순간에 대한 열정은 때로는 무모하고 부질없다. 그렇게 드라마 속 “너도 똑같아”라는 대사는 오롯이 나의 이야기가 된다.


소설 속 그녀는 '끝'의 이러한 개념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뒤라스의 소설 속 그녀는 조숙하다. 그녀는 ‘끝’의 이러한 개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또한 현실 도피에 대한 자신의 강렬한 욕망을 직시한다. 그녀가 가진 이러한 욕망의 근원은 (조금은 단순무식한 해석 같지만) 각각 그녀의 어머니와 큰오빠로 상징되는 '가혹한 가난'과 '폭력적인 세상' 그리고 이러한 가족에 대한 '애증'이다. 그래서 그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그래서 더 오묘한-금빛 구두와 남성용 중절모를 착용한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치이며 또래보다 훨씬 빨리 늙어버렸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채로 그를 유혹한다. 하지만 유혹의 순간조차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고, 우리는 언젠가 “서로를 떠날 것”이라고.


그러니까, 유한성.


 그러니까, 유한성. 그와 그녀의 관계는 애초에 이런 것들이 정해진 관계였다. 암묵적으로 서로의 마지막을 '인지'해버린 관계. 끝을 정해놓고 사랑하는 관계.

 그래서 관계의 끝을 향해가는 동안 그들은 서로를 갈망하고, 탐욕하며, 결국엔 서로가 서로의 것이 될 수 없음에 실망하고, 좌절하다. 내가 그를 ‘소유’한 이상 그것은 결국 없어지고 변해버릴 수 밖에 없으니까.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이자, 곧 유한성의 숙명이니까.


그러나 그 '유한성'이, 오히려 그녀가 그에게 내내 충실할 수 있게 했음을.


 그러나 그와 헤어진 후, 그녀는 결코 유한성의 허무함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완벽하게 반대되는 '불멸'이라는 단어로 승화시켜버린다.


 정해진 관계의 '끝'이 오히려 내가 그에게 내내 충실할 수 있게 했음을. 그 필연적인 유한함 속에서 나는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그리하여 너무도 슬펐지만, 그 슬픔이 곧 나의 '연인'이었음을.


 결국 끝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무엇보다 소중할 수 있었다고. 충실할 수 있었다고. 그렇게 나의 기억 속에서 우리의 시간은 늘 새롭게 기억되고 재생되며, 그는 '불멸'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것이 이별에 익숙해져 버린 나와, 살아 처음 이별을 했던 그녀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나는 한번도 유한성의 숙명에 반항하지 않았다.

 나의 이별이 그토록 쉬웠던 것은, 어느 새 내가 과정이 아닌 [끝]이라는 단어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이 주는 아픔에 취해 유한성의 숙명을 기필코 외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치감치 그를 포기했고, 한번도 숙명에 반항하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았다.


 순간에 충실하지 않아놓고도 나는 그에게 영원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내 곁의 그는 혼자 노력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매 순간 끝을 염두해두는 여자를, 그리하여 최소한의 마음만 베푸는 여자를, 누가 꾸준히 사랑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늘 사랑을 찾아 헤메었지만, 단 한번도 '사랑에 빠진 내 모습'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혼자 남았다.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을 거대한 이야기라고 봤을 때, 그 이해하기 쉬운 인과법칙과 드라마틱한 전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매력이 있어. 하지만 아들러는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즉 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말 그대로일세,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한다는 말이지.

다시 아들러가 했던 말을 인용해보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자네가 Y나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 주어졌는가'에만 주목하기 때문일 세. 그러지 말고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주목하게나.

-미움 받을 용기 중에서


3.

 끝의 의미를 알아버린 지금의 나는 이제 "영원히 사랑할게"라는 말보다 "영원히 널 잊지 않을거야"라는 말이 가지는 애틋함을 안다.


그러나, 그만큼 그에게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소중한 존재로 남고 싶다면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들의 1분 1초를 몽땅 털어내어, 상대방을 열렬히 사랑하는 수 밖에 없다. 나에게 주어진 관계의 끝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집중해야 한다.


결코 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유한성의 숙명에 저항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불멸의 연인은

우리에게 허락되었던 시간의 '한계성'속에서

그것이 가진 '필연적인 슬픔'속에서

비로소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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