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 앞에 갈팡질팡하는 이유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인 요즘입니다. 정년 때까지 걱정 없이 다닐 수 있는 공공기관 정규직 자리를 그만둔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한 달짜리 계약직으로 일을 하고는 있지만, 한 달 전과 아주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을 포함해 가까운 미래에 무엇으로 내 하루를 채워나갈지, 어떻게 내 생계를 이어나갈지 순전히 저의 판단만으로 결정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몇 시에 일어날지, 일어나서 밥을 제 때 챙겨 먹을지, 운동을 할지, 책을 읽을지, 창업 준비를 할지, 구인 공고를 찾아볼지, 넷플릭스를 볼지, 가까운 카페에서 알바를 할지, 당분간 모아둔 돈으로 살지, 여행을 갈지, 지역에 일자리를 구해서 내려가 볼지. 재밌는 건 한 시간 동안에도 스마트폰으로 이 넓은 스펙트럼의 선택지를 다 검색해보며 마음이 수없이 왔다 갔다 할 때도 있습니다.
제 머릿속에서 수많은 길이 저들을 좀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습니다. 멋쟁이 선생님처럼, 그래, 철수가 이야기해볼래?,라고 말하면서 수업에 중심을 잡고 이끌어나가야 하는데, 이 학생 저 학생에게 이끌려 다니며 분위기를 주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 학생 이야기도 들어줘야 하고, 저 학생 이야기도 듣다 보면 일리 있고, 저쪽 구석에선 어떤 학생이 울고 있고.
내 삶에 중심이 없이 해파리처럼 이 소리 저 소리에 휩쓸려다니다 어떤 선택을 덜컥해버리고 그 결과로 이뤄진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게 얼마나 두려운 미래인지 이제야 실감이 납니다. 결국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그것에 따라 나에게 성공적인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놓아야 어떠한 결정을 내릴 때 훨씬 수월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이어리에 적어봤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을 땐 되게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생각해보면서 써 내려가니 4개면 충분하더라고요. 건강, 귀여운 월급이더라도 소소하게 재미와 보람을 느끼며 할 수 있는 일,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실거주용 주택 1채. 각각의 요소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4가지만 있으면 행복한 삶이라고 느낄 것 같았어요.
이렇게 적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내 친구들은 이제 슬슬 결혼도 하고 있고, 직장에서도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 같고, 석사 학위도 대부분 땄고, 돈도 나보다 많이 모은 것 같고, 나만 적응 못해서 퇴사한 것 같고. 이런 생각들에 휩싸여 힘든 시기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만의 행복을 써보고 나니까 저들은 저들만의 행복 요소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 나도 나대로 나만의 행복 조각들을 모으기 위해 애쓰면 그뿐이다, 질투할 것도 없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시간이 날 때마다 넷플릭스 드라마 "무브투해븐 : 나는 유품 정리사입니다."를 보았습니다. 유품 정리사인 주인공이 유품을 정리하면서 돌아가신 분들 각자가 가진 스토리를 개인적, 사회적인 차원에서 풀어내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 가슴에 가장 오래 남아있었던 건 주인공 그루였습니다.
<아스퍼거 증후군>
사회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고, 행동이나 관심분야, 활동분야가 한정되어 있으며 같은 양상을 반복하는 상동적인 증세를 보이는 질환이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그루는 참 단순합니다. 성별이 같다고 해서 사랑이 사랑이 아닌 게 되는 것이 아니며(동성애), 사랑하는 이가 아프면 떠나지 않고 보살펴줘야 하며(해외입양),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데이트 폭력)
왜곡된 가치와 신념으로 인해 본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해 일어난 비극을 매일같이 뉴스 기사 속에서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던 저에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는 것처럼 단순하게 본질만 툭 내뱉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약간 벙쪄버리기도 합니다. 맞다, 그랬지. 그게 본질이었지. 나는 뭐에 씌어서 사랑을 사랑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일까. 비단 사랑만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사랑, 사람, 일, 삶, 모두. 우리는 무엇이 그리도 두렵고 걱정되어서 "내" 삶을 내 것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결정이 힘들다는 건, 그만큼 내가 나에게 중요한 가치들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뜻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했던 2년 간의 숲 속 실험이 그에게 단순하지만 충만하고 깨어있는 정신을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스스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무엇만 있으면 그가 행복할 수 있는지 스스로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월든'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도 일차원적인 의미에서 '숲에서 살자'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만큼, 군더더기를 다 덜어내고 당신 인생의 본질만, 핵심만 가지고 사세요, 라는 말을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하며, 오늘 제 머릿속과 방안을 단정하게 정리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