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 직무에 상관없는 '취미' 스터디
작년에 직무와 역량을 키울 서비스&디자인 스터디를 했다면 올해는 다른 스터디를 해보고 싶었다. 직무와 역량 스터디도 좋지만 항상 직무 관련 역량을 발전해야 해!라는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스트레스는 자유로운 사고와 원활한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이고 번아웃을 도래하게 만든다. 번아웃을 방지하기 위해 일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내가 좋아하고 예전보다 소홀해졌던 취미를 다잡고 싶었다.
서울에 막 상경했을 때, 지방에 있을 때 누리지 못한 문화생활을 한껏 즐기고 싶었다. 그러던 중 접근성과 장벽이 낮은 '영화관'이 눈에 들었다. 다양한 포맷으로 하나의 영화로 여려 경험을 할 수 있고 내가 모르는 세계를 영화를 통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래서 영화를 마음껏 보자고 생각했던 해, 일 년에 39편의 영화를 봤다. 다른 해, 영화에 푹 빠져서 한 해에 46편을 보기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19가 터지면서 영화관 발길을 뚝 끊었다. 전염병과 동시에 많은 OTT 서비스가 범람하니 영화관에 갈 필요를 못 느끼는 건 아니었다. 영화관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해서 코로나19로 사회적거리 두기를 할 때도 종종 가긴 했다. 그렇지만 현저하게 줄어들어 1년에 10편 이내의 영화를 보게 됐다. 게다가 코로나 19로 새로운 영화가 개봉하지 않고, 학생에서 회사원이 되니 자연스럽게 바빠졌다. 그렇게 살다가 문득 여유를 되찾고 싶었고, '일'에만 함몰되고 싶지 않았다. '일'에 고립되어가는 시선과 생각을 영화를 보면서라도 넓히고 싶었다.
신년을 맞아서 시작한 스터디는 일단 내가 아는 사람을 꾀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도 의향이 있으면 같이 하자고 홍보해달라고했다. 그렇게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모여 총 4명 됐다. 온라인으로 모여서 스터디 방향과 방법을 논의하고, 영화를 보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졌다.
일단 보고 싶은 영화를 주르륵 썼다. 그리고 서로 보지 않은 영화를 골라서 매주 1개씩 보기로 했다. 먼저 요일은 월요일로 하자고 의견을 냈다. 한 주의 시작을 영화와 함께하자는 취지도 있고 애매한 요일보단 차라리 모두 한 주를 시작하면서 다른 스터디, 활동이 거의 없는 요일인 월요일에 부담 없이 영화나 보자는 의미도 있었다. 다들 괜찮다고 해서 그대로 월요일로 정해졌다.
노션은 참 편리하다. 일정과 리스트 관리를 쉽게 할 수 있다. 같이 볼 영화 리스트를 만들어서 타임라인으로 만들어두고 같이 확인했다. 이전에 무엇을 보고, 앞으로 뭘 볼 수 있을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서로 보지 않았던 영화를 각자 2개씩 골라서 사다리타기로 순서를 정했다. 그래서 총 8개와, 도중에 우크라이나 다큐멘터리를 추가해서 보았다.
처음 정한 영화 리스트를 다 보고 2번째 리스트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이전처럼 개인이 영화를 2개 고르는 건 동일하지만, 영화를 고를 때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다큐)를 하나씩 골라서 상업-예술-상업-예술의 흐름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전에 너무 어둡고 답답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의 연속이라서 힘들었던 경험을 토대로 방법을 바꿨다.
넷플릭스 파티나 카톡을 통해서 영화를 같이 보고 실시간으로 의견을 나누는 일로 끝나지 않고 영화를 보고 난 뒤, 각자 감상문을 쓰기로 했다. 내가 스터디를 모집하면서 같이 정한 룰이었다. 영화를 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보고 나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느꼈는지 기록하면서 만인의 영화를 나의 영화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고 싶었다. 그렇다고 나 혼자 하면 나도 게으르니까 안 하게 될 것 같아서 같이 하자고 물귀신 작전을 썼다.
감상문의 정해진 틀은 없고 분량만 최소 500자라고 제한을 걸어두었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이것저것 인상 깊은 점과 궁금했던 점을 줄줄 나열하고 내가 잊지 않기 위해 줄거리도 추가하고 관련해서 개인 의견도 적다보면 최소 분량을 훌쩍 넘는 게 다반사였다.
필요하다면 장면 이미지를 추가하기도 하고, 원작이 있다면 원작 내용과 비교해서 기록했다. 그리고 스터디원과 감상문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이해와 생각을 공유했다. 내가 놓친 것과 보지 못한 조각을 보는 일은 즐겁다. 같은 영화를 보는데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내가 감상문을 쓰는 이유는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감상문을 보기 위해서가 되기도 했다.
노션을 통해서 쌓아간다고 해도, 온라인 기록의 한계는 내가 실제로 가지고 있다는 소유욕을 주지 못한다. 기념할만한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받으면 기분 좋고, 앞으로도 스터디 계속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할 수 있는게 무엇일까 혼자 고민했다.
다 같이 고민하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일단 스터디를 하자고 했던 사람이고, 여기까지 잘 참석해 준 스터디원에게 감사의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러다가 영화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티켓 굿즈가 떠올랐다. 봤던 영화를 모두 티켓으로 만들 순 없어서 하나의 티켓에 포스터 말고 영화 장면 중에서 의미가 있거나 인상 깊었던 장면을 찾아 넣었다. 영화 이미지와 타이틀과 함께 매치한 뒤, 뒷면에는 리스트와 개인이 별점을 넣을 수 있도록 만들고, 함께 봤던 날짜를 적었다. 그리고 하단에는 총 보았던 영상의 시간을 더해서 적었다. 인쇄소 방문수령실과 가까운 곳에서 파견을 나가 일을 하던 중이라 인쇄가 완료되었다는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른 스터디원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레드프린팅에서 3월 1일 주문(파일 업로드, 결제 완료) - 3월 8일 방문 수령했다
뒷면 타이틀을 필름 영수증으로 적은 건, 영화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앞으로도 포함될 것 같아서 모두 어우를 수 있는 단어를 고민하다가 결국 영수증으로 정했다. 사실 초반에 시네필이라는 단어를 써볼까 하다가 그 단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서 슬쩍 스터디원의 의견을 떠보았다. 역시나... 긍정적이지 않아서 조용히, 알아서 바꿨다. 단순하게 리스트를 사용할 수도 있었는데, 그냥 컨셉으로 영수증이 떠올랐다. 영수증에 맞춰서 아래는 총 시간을 더하니 11시간 4분이나 같은 영상을 보고 의견을 나눈게 되었다. 실제로 감상문을 쓰고 의견을 나눈 시간까지 하면 더 많아질 거란 생각에 괜히 더 뿌듯했다.
해당 선물을 받고 스터디원도 무척 좋아했다. 기뻤다. 한 바퀴를 끝낼 때마다 계속해서 만들다 보면 1년 뒤에는 적어도 3장, 많으면 4장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감상문을 쓰고, 영화를 보고 싶어졌다.
1차 리스트가 끝나고, 2차 리스트가 시작되면서 4명이었던 스터디원이 한 명 더 늘어서 5명이 되었다. 스터디원을 늘려도 5~6명을 최대로 생각하고 있는 이유는 많으면 다양한 감상문과 의견, 영화를 볼 수 있겠지만 감상문 공유와 참석률에 대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취미를 더 재밌고 뜻깊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 스터디의 취지를 잃고 싶지 않았다.
스터디를 언제까지 하자는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일단 1년, 지금 작성된 영화를 모두 보는 게 암묵적으로 스터디의 끝처럼 이야기 되었지만 확실하지 않다. 스터디가 좋고, 계속하고 싶으니까 끝을 생각하지 않고 계속 할 뿐이다. 끝을 생각하지 않는 대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다양하고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재밌어보이는 의견은 언제나 환영이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진짜 해보는 걸 추천하기 때문에 이런 의견이 나오면 적극 수용한다. 스터디로 이미 본 영화를 나중에 다시 보자는 의견도 나왔다. 다양한 영화를 보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경험한 게 많아지다 보면 이전에 보았던 영화의 감상도 달라질 수 있다. 2022년이 끝나갈 때쯤, 연말정산처럼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를 골라서 다시보고, 그동안 써왔던 감상문을 책으로 만들자는 의견도 오갔다. 스터디가 계속 이어져서 지금까지 나온 의견을 모두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직무 스터디도 슬슬 하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영화 스터디를 그만 둘 생각은 없다. 영화 스터디는 부담없이 즐길 수 있고, 내가 모르는 세계를 계속해서 알아갈 수 있는 좋은 창구다. 그런 창구를 닫고 싶지 않다. 같은 전공 외의 사람을 만나서 서로 다른 관점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무척 값지고 즐거운 경험이다. 새로운 관점과 방향을 배워서 내 현업에 접목시킬 수 있다.
생각의 환기와 휴식까지 되는 유용한 스터디! 사실 이렇게까지 좋은 효과를 줄지는 몰랐다. 그냥 하고싶어서 스터디원을 구했고, 하다보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이젠 월요일이 기다려지기까지한다. 매일 회사일을 하고, 그냥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게 아니라 매주 월요일마다 다른 영화를 보고, 다른 이야기로 한 주를 시작하면 남은 한 주가 알차고 빠르게 지나간다. 2022년이 시작되면서 함께 시작한 스터디로 1월부터 알차게 보내고 있다.
전공, 현업을 하면서 얻은 지식을 아카이브하는게 주였던 브런치에 슬그머니 내 일상의 한 켠을 같이 기록하게 되는 글이 영화 스터디에 관한 뿌듯한 기록이라서 기쁘다.